제10화
“이따가 눈 크게 뜨고 똑바로 봐!”
정수희가 고성은에게 윙크를 날렸다.
“오늘 제대로 보여줄게. 폭발적인 남성 호르몬이란 뭔지!”
고성은은 피식 웃었다.
“수희야, 너한테 이런...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정수희가 뿌듯하게 눈썹을 올렸다.
“이게 바로 안목이라는 거야! 풋풋한 꽃미남이 뭐가 좋다고? 나약하기만 하지. 이런 근육질 상남자가 제맛인 법이야!”
두 사람은 1번 VIP 박스로 들어갔다. 이곳은 전경이 최고라 아래 링에서 부딪히는 근육과 땀방울이 한눈에 보였다.
딩딩딩!
벨이 울리자 관중이 들끓었다. 곧 경기가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봐 봐 봐! 17번 올라온다!”
정수희가 은색 가면을 쓴 파이터를 가리키며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말했다.
“17번, 사랑해!”
고성은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17번의 몸매는 정말 폭발적이었고, 근육 하나하나가 단단한 강철 같아서 파워가 느껴졌다.
“수희야, 너 진짜 너무 빠져든 거 아니야?”
고성은이 웃으며 놀렸다.
“빠지면 어때? 내가 좋다는데!”
정수희는 휴지를 집어 들더니 순식간에 하트 모양으로 접고 진한 키스 마크를 찍어 웨이터에게 건넸다.
“오빠, 이거 17번한테 좀 전해 줘. 1번 박스 누나가 보낸 거라면서 힘내라고!”
웨이터는 익숙하다는 듯 휴지 하트를 받아 챙겼다.
17번은 링 옆에서 몸을 풀며 매서운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는 휴지를 받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1번 박스 쪽을 스윽 훑었다. 복잡하고도 오묘한 눈빛이었다.
땡!
벨이 울리며 경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7번은 치타처럼 순식간에 돌진했다. 부풀어 오른 근육, 울부짖는 주먹 바람, 한 방 한 방이 천둥처럼 몰아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이 떨리게 하였다.
“잘한다! 잘한다! 찍어 눌러, 찍어 눌러!”
정수희는 두 팔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링 위에 올라가서 17번 대신 싸워줄 기세였다.
고성은 역시 뜨거운 분위기에 휩쓸려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일 새도 없이 격투장을 응시했다.
퍽! 퍽! 퍽!
묵직한 충격음이 살을 때려 박으며 귓가를 찢었다. 3분도 안 돼 상대가 비명을 지르며 폭삭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객석은 즉시 들끓었다. 함성, 비명,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음이 터져 나왔다.
“17번! 17번!”
정수희가 앞장서 목 놓아라 고래고래 외쳤다.
17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방금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이어 그는 사회자에게 끌려 시범 경기를 더 치렀다. 이번에도 깔끔했다. 세어 볼 새도 없이 상대가 나가떨어졌고, 그의 손에서 3분 이상 버텨낸 사람은 없었다. 환호가 터졌다.
경기장은 17번 때문에 완전히 들끓었다. 관중들이 링 앞으로 몰려가 지폐를 뿌리자 돈다발이 눈처럼 흩날렸다.
“한 판 더! 한 판 더!!”
정수희만이 가방에서 고양이 자수가 든 벨벳 수건을 꺼내 힘껏 던졌다. 수건은 17번 발 앞에 정확히 떨어졌고, 그는 허리를 굽혀 주워 들더니 한 번 훑어 보고는 곧바로 링을 내려가 백스테이지로 사라졌다.
“꺄악, 내 선물 받아 갔어! 하하하!”
정수희는 눈에서 별이 반짝이는 듯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봤지? 이게 진짜 남자야! 돈에는 눈도 안 돌리고 이 누나의 사랑에만 멈춰 서는 거, 완전 상남자라고!”
고성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희야, 네 상상력으로 소설 안 쓰는 거 진심 아까워.”
경기가 끝났지만 정수희는 흥분이 가시지 않아 고성은을 끌고 17번을 찾으러 백스테이지로 달려갔다.
“가자! 사인에 사진까지 받아야지! 이런 레어템 놓치면 평생 후회야!”
하지만 백스테이지를 아무리 뒤져도 17번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쳇, 빨리도 도망갔네!”
정수희는 잠깐 실망하더니 곧 웃으며 말했다.
“뭐 어때, 이 정도 남자라면 기다릴 가치가 있는 것 같아. 성은아, 우리 클럽 가서 한잔하면서 17번의 승리 축하하자!”
두 사람은 최고급 클럽 화연으로 향했다. 그들은 들어서자마자 당구 구역의 열기에 시선이 쏠렸다.
“우와, 사람 많다?”
정수희가 호기심 가득히 다가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당구대 하나를 빙 둘러싸고 열중해 지켜보며, 때때로 박수와 환호를 터뜨리고 있었다.
화려한 꽃무늬 셔츠를 입은 키 큰 남자가 큐대를 잡고 세련되고도 날쌘 동작으로 두 큐 만에 테이블을 싹 비우자, 또 한 번 박수가 쏟아졌다.
경기를 마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 띄는 두 미녀, 정수희와 고성은을 발견하고는 눈빛이 번쩍이며 입꼬리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고 다가왔다.
“두 분, 한 게임 같이 즐겨 줄래요?”
남자의 웃음에는 자신감과 도발이 섞여 있었다.
정수희가 그를 위아래로 훑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이 실력으로? 시시하네요.”
남자는 그 말에 흥이 돋아 말했다.
“오? 눈 높으시네? 그럼 내기할까요?”
“어떤 내기요?”
정수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흥미롭게 물었다.
“내가 이기면...”
남자는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묘하게 웃었다.
“여기 뽀뽀 한 번, 어때요?”
정수희는 바로 폭소했다.
“뽀뽀? 꿈도 크시네! 우리가 이기면...”
그녀는 무대를 가리키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기 올라가서 스트립 댄스 춰요. 할 수 있겠어요?”
“와아!”
주변이 환호로 들끓었다. 다들 박수를 치면서 경기에 흥을 돋웠다.
남자는 잠시 멍했으나 곧 껄껄 웃었다.
“재밌네! 콜! 그러면 제 상대는 누가 될까요?”
그의 시선이 정수희와 고성은을 번갈아 스쳤다.
정수희는 망설임 없이 고성은을 앞으로 밀었다.
“당연히 우리 성은이죠! 성은이는 당구 고수라 당신 같은 초짜는 눈 감고도 상대해요.”
불쑥 밀려난 고성은이 휘청하며 정수희를 봤다.
“정수희, 너...”
정수희는 눈을 찡긋하며 속삭였다.
“성은아, 겁먹지 마! 이 언니를 위해 복지 한다는 생각으로! 가서 박살 내!”
고성은은 웃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수희가 잔뜩 신난 것을 보니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거 손에 잡아 본 게 5, 아니 6년 만인가? 오랜만이라 그런지 조금 낯선데...’
앞으로 밀려난 고성은을 바라보는 주변 시선에는 호기심과 의심, 그리고 구경꾼의 흥분으로 가득 찼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쉰 뒤 차가운 큐대를 집었다.
‘그냥 몸 푼다고 생각하자.’
남자는 큐대를 잡는 그녀의 손짓이 제법이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얕보는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가식적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레이디 퍼스트.”
고성은은 말없이 당구대로 다가갔다. 몸을 살짝 숙이고 호흡을 가다듬자 주위 소음이 잦아든 듯했다.
흐릿한 조명 아래에서 그녀 눈빛이 매서운 매처럼 변했고, 테이블 위 반듯이 놓인 아홉 개의 공을 정조준했다.
오른손을 단단히 뒤로 젖혔다가...
팡!
청량한 타격음. 흰 공이 번개처럼 튀어 나가 공 더미를 정확히 쳤다.
색색의 공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하나, 둘, 셋... 브레이크 샷 한 방에 세 공이 그대로 포켓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