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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밤 10시 정각. 검은색 마이바흐가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달려 시내의 어느 아파트 앞에 멈췄다. 가로등 불빛이 창문을 통과해 운전석에 앉은 육정호의 얼굴을 선명하게 그려 냈다. 육정호는 곧바로 시동을 끄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조수석의 고성은을 바라봤다. 고성은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살짝 한쪽으로 기울이고 고른 숨을 쉬며 잠든 듯했다. 길고 짙은 속눈썹이 눈두덩 아래에 작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차 안은 히터가 빵빵했다. 그녀의 새하얀 뺨에는 미세하게 분홍빛이 돌았다. 육정호는 핸들 위에서 손가락을 움찔 접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 생각이 고개를 내밀자마자 그는 단호히 눌러 꺼버렸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차 안에는 두 사람의 호흡만 남았고, 밖에서는 이따금 경적만 흘러왔다. 곧 고성은이 몸을 살짝 움직였다. 그녀는 실제로 잠든 게 아니라 눈을 감고 쉬고 있었을 뿐이었다. 차가 완전히 멈춘 것을 느끼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동자 깊은 곳에는 아직 피로가 조금 남아 있었다. “도착했어요?” 방금 깬 듯 나른한 목소리에는 일부러 거리를 두는 듯한 냉기가 섞여 있었다. 육정호는 가슴이 한 박자 놓친 듯 멎었다. “그러면 저는 들어가 볼게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밀고 나갔다. “성은아!” 육정호도 서둘러 차에서 내려 저녁 공기를 뚫는 낮은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고성은이 몸을 돌렸다. “선배, 무슨 일이에요?” 그는 손을 내밀었다. 고성은의 몸이 순간 굳었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손끝은 그녀 어깨에 있지도 않은 먼지를 살짝 털어냈을 뿐이었다. 동작이 너무 빨라 그녀는 순간 착각인가 했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 남은 따뜻한 온기가 얇은 옷자락을 통해 분명히 전해졌다. 살짝 저릿한 전류까지 딸려 와서, 고성은의 심장은 무엇인가에 가볍게, 그러나 분명히 부딪혀 꽉 막힌 듯했다. 육정호는 천천히 손을 거두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애써 목소리를 고르게 다듬어 친절한 선배처럼 보이려 했다. “일찍 쉬어.” 그 네 글자를 그는 일부러 느리고 다정하게 뱉었다. 고성은은 2초 정도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정석적인 예의 미소를 지었다. “네, 선배도요.” 하지만 웃음이 눈에는 닿지 않았다.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더 머뭇대지 않고 몸을 돌려 빠르게 로비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오자 현관의 센서등이 자동으로 켜졌다. 고성은은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곧장 서재로 향했다. 평범해 보였지만 실은 비밀이 가득한 노트북을 열었다. 손가락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자 화면에 복잡한 코드와 의학 용어가 순식간에 떠올랐다.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고 집중되어 평소의 조용하고 소심한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모니터 빛이 그녀 얼굴에 반짝이며 명멸했다. 그녀는 검색창에 빠르게 한 줄을 입력했다. [최씨 가문 김만옥 여사, 폐암 중기, 최신 치료 방안 및 임상 데이터 분석] 다음 날, 따스한 햇살에 산들바람까지 상쾌했다. 정수희가 정신없이 돌아왔다. 문도 열기 전에 목소리부터 터져 나왔다. “성은아! 나 왔어! 엄마가 정성껏 끓인 점심 들고 왔으니까 얼른 먹어 봐, 기내식은 진짜 사람 먹을 게 아니더라!” 고성은은 의학 서적을 내려놓고, 그녀의 몸에 매달리다시피 한 정수희를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방금 돌아왔는데 좀 쉬지 그래?” 정수희는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진지하게 살폈다. “음, 혈색 괜찮네. 회복도 잘 됐으니까 오후에는 나랑 쇼핑 갈 수 있겠어.” 고성은이 웃었다. “또 쇼핑 생각이야? 이번 출장은 잘 끝났어? 고객하고 계약했어?” 정수희는 가슴을 두어 번 치며 으스댔다. “누가 출동했는지 몰라? 내가 간 곳은 영진시야. 우리 외삼촌이 거기 시장인데 못 잡을 고객이 있겠어?” 말을 마치고 그녀는 뿌듯하게 윙크했다. 고성은은 이마를 탁 쳤다. “나중에 외삼촌한테 민폐만 끼치지 마.” 정수희는 입을 삐죽였다. “이게 다 아빠 탓이야. 셋째를 낳지 않아서 집안 책임이 전부 나한테 쏠렸다니까.” 고성은은 그녀를 흘겨보고 식탁으로 이끌었다. “아주머니가 어떤 걸 해주셨어?” “네가 좋아하는 거 다 있지. 파인애플, 고기 완자, 소고기, 거기에 뭇국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인다. 역시 음식 솜씨로는 정수희의 어머니가 최고다. 그때 정수희의 표정이 갑자기 가라앉더니 말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안영국 마틴시로 갈 거야.” 고성은이 잠시 멈칫하다가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는 나도 같이 갈게.” “응, 일단 국부터 마셔.” 정수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고성은은 마틴시 이야기가 정씨 가문의 아픈 상처라는 걸 알고 있었다. 5년 전, 정수희의 오빠 정지석이 마틴시에서 큰 폭발 사고를 당했고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그 뒤로도 정씨 가문은 계속 사람을 보내 수소문했지만 5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정씨 가문의 상업 제국은 자연스레 정수희의 어깨로 넘어왔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영업팀 관리직 자리를 맡겨 우선 실무를 익히게 했다. 두 사람은 국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고성은이 문득 물었다. “맞다, 수희야. 김만옥 여사님이 편찮으시다던데. 너는 아는 거 있어?” “김만옥 여사?” 정수희는 수저를 내려놓고 눈빛이 달라졌다. “최민우 할머니 말하는 거야?” “응, 전에 최민우 씨가 말했는데 폐 쪽이 안 좋다더라.” 정수희는 기억을 더듬었다. “여사님은 정말 인자하신 분이야. 나 어렸을 때 생신 축하드리러 간 적도 있어.” 그녀의 얼굴에 살짝 그리움이 번졌다. “그런데 최근 몇 년은 저택에서 요양하시느라 좀처럼 뵙기 힘들어.” 정수희가 뭔가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였다. “네가 도와드리면 어때?” 고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면 우선 직접 뵈어야 하는데, 너무 의도적으로 보이면 곤란하잖아.” “아, 맞다! 이달 말이 여사님 생신이야. 최씨 가문에서 행사를 크게 하지는 않아도 친한 분들은 조용히 초대할 거야. 그때 우리도 같이 가자!” 고성은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정수희를 바라봤다. “좋아.” 즐겁게 식사하던 중, 정수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에 뜬 사진은 고세형이 어떤 신예 배우와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정수희는 차갑게 말했다. “이 녀석 갈수록 눈이 썩어가고 있네.” 고성은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정수희는 환하게 웃었다. “내가 이 정도로 흔들릴 것 같아? 고세형? 내 세상에서는 그냥 한 사람의 이름일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녀는 맑은 눈으로 당당하게 아무 동요 없이 말했다. 둘은 같이 자랐고 18살에 약혼까지 했지만, 그동안 고세형은 매일 같이 여자를 갈아치웠다. 정수희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녀는 언젠가 실권을 쥐고 파혼을 선포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아직 고씨 가문과 완전히 틀어질 때가 아니다. 고성은도 더는 걱정하지 않았다. “누가 보낸 거야?” “몰라. 매달 한 장씩, 생리보다 더 정확해. 사진마다 여자가 달라. 예전에는 핫한 슈퍼모델이더니 이제는 일반 연예인으로 격하됐어, 참.” 정수희는 사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고성은이 웃었다. “IP 주소 줘 봐. 사람 시켜서 추적해 볼게.” 정수희는 두 손으로 엑스 표시를 하며 막았다. “안 돼, 이 사람 무료 탐정인데 안 쓰면 손해지. 그리고 덕분에 내 협상 카드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고.” “알겠어, 네 마음대로 해.” 친구가 담담해하니 고성은도 안심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쉰 뒤 고성은은 서재에 틀어박혔다. 그 사이 육정호에게서 전화가 와서 저녁 식사를 제안했지만, 그녀는 피곤하다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밤이 되자 정수희가 억지로 그녀를 끌어내 화려한 ‘전투복’으로 갈아입히고는 집을 나섰다. 꽃다운 나이에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 청춘에 대한 배신이라는 논리였다. 섹시하게 꾸민 정수희는 오늘 완전히 풀파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이 제일 잘 나간다고 쓰여 있는 듯했다. 물론 고성은도 뒤지지 않았다. 고운 얼굴에 큰 키, 가볍게 화장만 했는데 불길 같은 붉은 드레스 한 벌로 시선을 붙잡았다. 밤 7시, 둘은 시내 중심의 붐비는 복싱 도장에 도착했다. 고성은은 간판을 올려다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간판에는 전설도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고성은이 네온이 번쩍이는 반구형 건물을 가리켰다. “내가 술 마시고 진실게임이나 하는 얼간이라고 생각했어? 여기가 내 비밀 아지트야. 오늘 네 눈을 제대로 열어 줄게.” 정수희는 VIP 카드를 내밀어 문제없이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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