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그 후 며칠간, 송현우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진아린의 이혼 소송을 맡아 그녀를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진아린의 마음이 심란하다는 말에 그는 밤을 새워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 그녀의 단짝 친구를 곁으로 데려왔고 그녀를 웃게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숱한 신호등을 무시하며 그녀가 제일 좋아하던 디저트 가게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이게 다 진아린에게 진 빚 때문이라고 했지만 정작 진아린이 돌아온 날 그가 술에 취해 밤새도록 부른 이름도 진아린이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남자란 다 저렇게 말과 행동이 다른가 보다.
진아린이 이혼하던 날, 송현우는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땐, 그는 이미 소파에 쓰러진 채 손에는 낡아빠진 인형 하나를 든 채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그 인형을 나는 본 적이 있었다. 진아린이 그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나는 그 인형이 진작에 버려진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인형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몇 번이고 진아린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힘겹게 그를 부축하려 하자 그는 나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아린아, 너 돌아온 거 맞지. 네가 날 떠나지 않을 줄 알았어.”
그는 나를 진아린으로 착각하고는 절대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노래방에서 봤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서 친구들 앞에서 제 속내를 줄줄이 늘어놓던 그의 모습 말이다.
“이도훈, 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지 못했어. 윤지아가 그 애랑 많이 닮았지만, 결국 진아린은 아니잖아. 윤지아가 임신했어. 이제 아빠가 되는데 이상하게 그렇게 기쁘지가 않아...”
그날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 노래방 문을 나섰는지 모르겠다.
그저 다리에 납이라도 매달린 것처럼 무거웠고 얼굴을 뒤덮은 눈물이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그날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송현우가 달려왔을 때, 그의 손에는 채 끊지 못한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진아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곧이어 날카로운 파열음과 소란스러운 소음이 뒤섞여 들려왔다.
“윤지아, 제정신이야? 이런 뻥 뚫린 길에서 차를 들이받게. 난 변호사지, 의사가 아니야. 나 바빠. 네 시답잖은 뒤치다꺼리나 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그는 매정하게 돌아섰고 전화를 받는 그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고 침착했다.
문득 예전에 내게도 저렇게 다정한 말투로 속삭였던 날들이 떠올랐다.
오직 나를 만나기 위해 도시를 가로질러 비를 맞으며 우리 집 아래서 기다리던 그였다.
나는 고아였고 할머니가 쓰레기통에서 주워다 길러주셨다.
그는 할머니에게 나를 잘 돌보겠다고, 평생 나 하나뿐이라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어겼다.
술에 취한 송현우에게서는 평소의 냉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내 눈앞에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택했던 그 소년이 아른거렸다.
내 가장 비참했던 시절에 나타나 한 줄기 빛처럼 내 삶을 비춰주었고 나를 사랑한다고, 내게 가정을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던 소년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단지 내가 진아린을 닮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그는 내게서 진아린의 그림자를 보며 결혼을 약속했다.
어차피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후로는 누구라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나는 생각했다.
‘그만하자, 송현우. 이제 널 놓아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