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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도망가자

진료실을 나선 문지원은 곧장 약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병원 안에서는 흡연이 불가하니 여진우가 밖에 나간 줄 알았다. 그런데 문을 열자 벤치에 앉아 통화하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이내 저도 모르게 처방전을 꼭 움켜쥐었다. 절대 보여줘서는 안 되었다. 여진우 몰래 돌아가서 약국에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곧이어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리 와.”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큰 키에 팔다리까지 길쭉한 남자가 일반 벤치에 앉아 있으려니 괜히 불편하고 답답해 보였다. “앉아.” 그는 옆자리를 흘끗 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스피커 모드로 바꿨다. 심창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 대표, 우리 손자가 너무 경솔했지? 대신 사과하겠네. 문지원 양이 여 대표의 여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미리 알았더라면 무영이 그 자식 다리를 문질러버리더라도 끼어들지 못하게 했을 텐데.” 자기부터 살고 보려는 심창호의 마음은 이해가 갔다. 어쨌거나 여진우를 건드리는 건 결코 현명한 선택은 아니니까. 그런데도 문지원의 마음속엔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다. 절대적인 권력 앞에서 자신도, 심무영도 너무 나약한 존재라 조종당하기 마련이었다. 목적을 이룬 여진우는 전화를 끊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의사한테 약 받았어?” “네.” “얼른 약국 다녀와.” 그가 돌아서자 문지원은 처방전을 꼭 쥔 채 따라갔다. 머릿속으로 어떻게든 따돌릴 핑계를 지어내던 중 다행히도 하늘이 도와줬다. 여진우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아저씨, 저 혼자 갈게요. 이따가 병원 입구에서 봐요.” 여진우는 그녀를 흘긋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에 경고의 의미가 다분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얼른 다녀와.” 괜히 잔머리 굴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걸어 나가는 남자의 모습을 보자 문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아랫배의 통증을 참으며 약국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대기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고, 10분 뒤 처방약을 받게 되었다. 이내 주변을 살피다가 한적한 비상계단을 발견했다. 이때, 휴대폰이 울렸다. 심무영이었다. 문지원은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마치 그녀가 받을 때까지 연락할 기세였다. 결국 마지못해 비상계단으로 뛰어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원아.” “무영 씨, 지금 제정신이야? 여진우한테 눈엣가시로 찍히고 싶어?” 괜히 그녀 때문에 심씨 가문은 물론, 심무영이 화를 입는 걸 원치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멀쩡해. 그리고 네가 협박당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 진심으로 나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잖아. 집에 돌아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요즘은 법을 어기면 반드시 처벌받는 세상이야. 타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걸 인정만 한다면 대신 경찰에 신고해줄게. 최소한 국내에서는 아무리 여진우라고 해도 우리한테 함부로 못 할 거야! 차라리 같이 도망갈래? 낯선 도시로 가서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 지내면 되잖아.” 다정한 목소리에 은근한 기대가 묻어났다. “지원아, 네가 항상 했던 얘기가 있었잖아. 과거를 잊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새로운 시작이라... 이는 문지원에게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고개를 숙이자 손에 든 약 포장지에 적힌 ‘피임’이라는 두 글자가 유독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문지원은 소스라치게 놀리며 고개를 돌렸다. 여진우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눈빛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네가 대답하길 기다리고 있잖아. 혹시 방해된 건가?”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문지원 손에 있던 약을 빼앗아 들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생수라도 한 병 사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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