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가게 안.
문재하의 비서인 이현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문재하를 말렸다.
“도련님, 어르신께서 아시면 어쩌시려고 이러세요.”
“시작해주세요.”
하지만 문재하는 들리지 않는지 타투이스트에게 시작하라는 말만 한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신하린을 가슴에 새기는 거라 생각하니 바늘이 살갗을 파고드는 통증도 아무렇지 않았다.
2시간 후, 문재하는 문신을 다 새긴 후 아직 피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데도 고집스럽게 가게를 나와 차에 올라탔다.
“망월 절벽으로 가주세요.”
“안됩니다! 거기는 너무 위험해요. 게다가 지금 막 가슴에...”
“가주세요.”
문재하는 이현수의 말림에도 들은 척을 하지 않고 기사에게 출발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차 안에서 문재하의 모든 행동을 다 지켜본 신주은은 그제야 신하린이 아까 파티에서 했던 이상형 관련 말이 떠올랐다.
“이름은 새겼고 그럼 이제는... 절벽으로 가서 장미를 따다 줄 차례인가?”
신주은은 허탈한 듯 웃다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아가씨, 계속 따라붙을까요?”
운전기사가 물었다.
“아니요. 집으로 가죠.”
그날 밤, 신하린의 인스타는 그녀가 ‘절벽에서 오직 나를 위해 장미를 따다 준 사람’이라는 문구와 함께 올린 장미 사진으로 난리가 났다.
그리고 새벽 세 시쯤 문재하는 오른손은 골절에 피가 떡이 돼서는 신주은의 별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겉모습과 달리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환하고 밝아 보였다.
아침.
신주은이 외출하기 위해 방을 나와보니 마침 문재하도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오른손은 붕대가 감겨있는 것이 참으로 볼만한 몰골이었다.
“아가씨.”
게다가 목소리까지 잔뜩 가라앉아있었다.
“어제 차로 이동하다가 사고가 조금 나서 그런데 휴가를 며칠 더 연장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사고는 무슨. 장미 따려다가 절벽에서 구른 거면서.’
신주은은 다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친구들과 결혼 전 마지막 파티를 하는 날이라 그녀는 곧장 클럽으로 향했다.
VIP룸.
“오늘은 마시고 죽는 거야!”
신주은의 절친한 친구인 임수아가 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
“좋아!”
“우리 주은이 이제는 사모님 소리 들으며 살겠네?”
임수아가 신주은의 어깨를 감싸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러니까. 부럽다, 부러워.”
샴페인타워가 오르고 친구들의 축하와 함께 즐거운 음악도 흘러나왔지만 신주은은 어쩐지 영 텐션이 오르지 않았다.
“내가 볼 때 차라리 식물인간 남편이 나아.”
임수아가 술에 취한 채 술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봐봐. 잘생겼지, 부자지, 바람피우는 것 때문에 속 썩일 일 없지, 이거 완전 여자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결혼이잖아. 안 그래?”
“맞아, 맞아!”
옆에 있는 친구도 그 말에 호응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은아, 앞으로 강씨 가문이 발을 담그고 있는 산업들은 모두 다 네 거야. 넌 진짜 복 받은 거라고!”
신주은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천천히 돌렸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게 다 내 거래. 앞으로는 오늘처럼 이렇게 술을 마시는 일은 없을 거야. 그 집안이랑 결혼한 이상 조용히 있어야지. 누가 되지 않게.”
친구들은 신주은의 말에 잠시 침묵하더니 곧바로 다시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야, 너무 걱정하지 마. 네 남편, 분명히 금방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날 거야.”
“맞아. 이렇게 예쁜 신부가 곁에 있는데 자기가 안 일어나고 배겨?”
“주은아, 1년이 지났는데도 안 깨어나면 그때는 우리가 직접 깨우러 갈게!”
신주은은 친구들의 말에 그제야 편히 웃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5시간 후.
이제 집으로 가기 위해 하나둘 일어나던 그때 임수아가 갑자기 신주은을 꼭 끌어안으며 울먹였다.
“너희 아빠는 정말 세상에서 제일 나쁜 인간이야.”
“응, 맞아.”
“네가 내 딸이었으면 난 너를 엄청 예뻐해 줬을 거야.”
“응, 알아.”
신주은은 눈을 감은 채 임수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신하린 그거 내가 대신 때려줄까? 다시는 못 기어오르게?”
“아니, 그러지 마. 아빠도 신하린도 이제는 나랑 상관없는 인간들이야.”
“뭐야. 왜 너희 둘만 안아. 나도 안을래.”
“나도.”
“나도.”
신주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친구들을 하나하나 다 꼭 끌어안아 주었다.
마지막 포옹까지 마치고 계산하기 위해 룸을 나서던 신주은은 바로 옆 룸을 지나칠 때쯤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이 장미가 정말 절벽에 피어있었던 거라고?”
“그렇다니까. 프로 등산팀도 쉽게 오르지 못하는 곳인데 직접 가서 따온 거야.”
신주은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안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신하린과 그의 친구들이 있었다.
“헐, 그런데 그런 위험한 곳을 혼자서 갔다고? 어제 꽃 주러 올 때 보니까 가슴팍에 네 이름까지 새긴 것 같던데 네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나 봐?”
신하린의 절친한 친구인 서다경이 놀람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그러면 뭐해. 그저 경호원일 뿐인데. 잊었어? 나한테는 이미 문씨 가문의 후계자라는 어마어마한 남자가 있다고.”
신하린이 피식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장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문재하는 그저 간간이 다른 남자가 필요할 때 쓰는 여비용으로 두고 있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