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서다경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여비용으로 삼겠다고? 너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야, 네가 뭘 모르나 본데 남자들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들켜도 적당히 말로 구슬리면 금방 다시 나한테 충성을 바치게 되어있어.”
신하린은 문재하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한편 그 모든 대화를 전부 듣고 있던 신주은은 문득 이 말을 들은 사람이 문재하였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해졌다.
‘문재하, 이게 바로 네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실체야. 아마 넌 평생에 걸쳐도 모르겠지만.’
신주은은 피식 웃더니 다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클럽에서 나온 후, 그녀는 집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 어머니가 있는 묘원으로 향했다.
묘원.
신주은은 묘비 옆에 있는 어머니의 사진을 매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엄마, 나 곧 결혼해. 상대가 식물인간이기는 한데... 좋아. 적어도 아빠처럼 바람을 피우지는 않을 테니까.”
사진 속 신주은 어머니의 얼굴은 무척이나 자애로웠다.
“걱정하지 마. 난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신주은은 차가운 묘비를 매만지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목숨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짓, 나는 안 할 거야. 나는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정을 나누면서 그렇게 평온하게 잘 살 거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신주은은 날이 어두워질 때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본 후 묘원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바로 짐 정리부터 했다.
옷가지들과 액세서리, 그리고 앨범까지 신주은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중요한 것들은 전부 다 캐리어에 넣었다.
짐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왔고 아침 6시가 되자 계좌에 약속했던 금액인 2조가 입금되었다.
1분 뒤 전화가 걸려와 받아보니 신성철이었다.
“오늘 바로 성남으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그쪽에서 재촉하고 난리도 아니야. 계좌는 확인했지? 그리고 문재하는...”
“내가 알아서 본가로 보낼게.”
신주은이 냉랭한 말투로 신성철의 말을 잘라버렸다.
“나는 이제 문재하 필요 없어.”
그녀의 말에 신성철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얘기했다.
“주은아, 아빠는 너도 너희 엄마도 정말 진심으로 사랑했었어...”
“예전에는 그래도 자기 주제는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양심까지 다 팔아먹은 인간이었네.”
신주은은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 아예 신성철의 번호를 차단해버렸다.
빵빵.
이삿짐센터가 도착하고 신주은은 직원들에게 지시하며 이삿짐을 옮기도록 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방에서 나온 문재하는 바닥 한가득 쌓여있는 상자와 캐리어들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게 다 뭡니까?”
“보면 몰라요?”
신주은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짐을 정리하며 답했다.
“이사하잖아요.”
“...그렇군요.”
문재하는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성북에서 성남으로 가는 이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신주은은 허리를 펴며 그제야 문재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재하 씨는 따로 해줄 일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지금 당장 붕어빵을 한가득 사서 신하린한테 직접 가져다줘요.”
문재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지시에 조금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문재하의 담담하던 눈빛이 그녀의 말에 아주 잠깐 흔들렸지만 금세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신하린을 보는 거라면 뭐든 좋으니까.
“이사를 마치고 나면 새집 주소를 저한테 문자로 보내주세요. 정리를 마치고 저도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24시간 밀착 경호가 그의 일이기에 그는 경호원으로서 응당 해야 할 말을 신주은에게 건넸다.
하지만 신주은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문재하는 한참을 기다려도 답이 없자 알아서 보내겠지 하고 멋대로 생각한 다음 대문을 나섰다.
그때 등 뒤에서 그녀가 뭐라 얘기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발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저 부르셨습니까?”
신주은은 햇빛을 가득 받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문재하가 떠난 후 신주은도 천천히 차에 오르며 기사에게 말했다.
“공항으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의 풍경을 보며 그녀는 유심을 꺼내 부러트린 후 그대로 창밖에 던져버렸다.
이로써 모든 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