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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전남친의 조련

수속은 순조롭게 마쳤다. 서지강은 그녀를 안고 구청 밖으로 나와서는 손을 불쑥 내밀었다. “휴대폰.” 임가윤은 어리둥절했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순순히 꺼내서 건넸다. 남자는 뼈마디가 선명한 손가락으로 빠르게 조작한 뒤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내 연락처랑 아파트 비밀번호야. 같이 살아도 되고, 싫으면 말고.”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서 카드를 한 장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안에 월급이 들어 있어. 비밀번호는 9999.” 평범하기 그지없는 체크카드와 수수한 옷차림을 번갈아 보던 임가윤은 차마 손이 가지 않았다. 그녀가 평소에 들고 다니는 한정판 가방 하나만 해도 어쩌면 몇 달 치 월급과 맞먹을 수도 있다. “괜찮아요. 결혼하고 재산은 따로 관리하기로 했잖아요.” “그건 네가 정한 규칙이고.” 서지강은 멈칫하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대원들도 월급 통장은 다 아내한테 맡겨.” 임가윤은 묵묵부답했다. 설마 허울뿐인 결혼을 좀 더 그럴듯하게 연기하려는 걸까? 나중에 약점이라도 잡힐까 봐? 아니면 겉모습뿐일지언정 ‘남편'이라는 역할만은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니 받는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알겠어요. 그럼 제가 대신 보관할게요.” 임가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받아 챙겼다. 서지강은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난 먼저 갈게.” 임가윤은 그 자리에 서서 떠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혼인신고를 위해 전생에 그녀는 얼마나 큰 노력을 들였던가. 돌려 말하고, 에둘러 힌트를 줘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결국 임신검사 도중 의사의 말에 떠밀리듯 하게 되었다. 당시 얼마나 하기 싫었을까. 그런데 이번 생에는 너무나도 쉽게, 심지어는 우스울 만큼 허무하게 목적을 이루었다. 임가윤은 비웃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눈빛만큼은 싸늘하고 냉소적이었다. 이내 서류를 가방에 넣고 택시를 부르려던 순간 검은 세단 한 대가 조용히 멈춰 섰다. “임가윤 씨 맞나요?” 임가윤은 깜짝 놀랐다. “네, 맞아요.” 기사가 미소를 지었다. “방금 남편분께서 차를 불렀어요. 댁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릴게요.” 임가윤은 어안이 벙벙했다. 겉보기에 투박한 남자에게 이런 세심한 면이 있을 줄이야. 보아하니 ‘전남친’이 꽤 잘 길들여 놓은 모양이다. ... 저택에 들어서자 집 안 분위기가 평소와 사뭇 달랐다. 거실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명절보다도 더 시끄럽고 떠들썩했다. 임가윤이 문을 열자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친척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가윤아, 드디어 왔구나.” “얼마나 속상했겠니! 그 문태오란 놈, 진짜 인간도 아니야. 결혼이 무슨 소꿉놀이야? 진짜 너무하네.” “그러게 말이다! 박소혜도 완전 여우더라? 나이도 어린 게 나쁜 짓만 배워서 남의 약혼자나 가로채고. 낯짝도 참 두껍지!” “가윤아, 너무 상처받지 마. 이 세상에 널린 게 남자야.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잊는다고 하잖니.” 그녀는 한참 동안 넋을 잃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오늘은 5월 20일이다. 원래라면 문태오와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 문태오는 가장 호화로운 호텔 연회장을 통째로 빌렸고, 상류층 인사에게 전부 청첩장을 돌려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자랑했다. 전생에 이 ‘세기의 결혼식’은 모든 매체의 1면을 장식했고, 일주일 내내 화제가 식지 않았다. 그녀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존재가 되었고, 동화 같은 아름다운 사랑을 누렸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이번 생에는 박소혜를 선택했으니 정성껏 준비한 그 화려한 결혼식도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겠지. “가윤아, 너무 신경 쓰지 마.” 평소엔 왕래도 거의 없던 먼 친척 아주머니가 걱정하는 척 말을 건넸다. “결혼이 깨져서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라. 괜히 그 집에 시집갔다가 고생만 하면 큰일이잖아. 우리 옆집 아저씨 아들 알지? 외국에서 막 들어왔는데, 인물도 훤하고 사람도 괜찮더라. 소개 한번 받아볼래?” 임가윤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이내 속상하고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당장이라도 혼인신고서를 꺼내 마음만 먹으면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고소해 죽겠다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죠.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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