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혼인신고
“내 조건은 단 하나야.”
그는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난 여자한테 관심 없어. 결혼은 그냥 집안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거니까 너나 잘해. 괜히 몰래 흑심이나 품지 말고.”
임가윤은 다시 한번 남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봤다.
넓은 어깨, 날렵한 허리 라인, 길게 뻗은 다리, 티셔츠 위로도 드러나는 단단한 가슴과 팔근육 덕분에 몸매가 한층 돋보였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파워풀한 에너지와 강렬한 남성 호르몬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혈기 왕성한 남자가 무성욕자라니?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설마 남자를 좋아한다는 뜻인가?
다시 말해서 정말 각자의 수요에 의해 한배를 탄, 철저한 형식적인 결혼일 뿐이었다.
집안의 강요를 피해 “화려한” 삶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건가?
시시각각 변하는 임가윤의 표정을 보며 서지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못 하겠어?”
임가윤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자 볼에 옅은 보조개가 드러났다.
“공교롭네, 사실 저도 남자에게 별 관심 없거든요. 특히 지강 씨 같은 타입은 더더욱. 저는요, 감정 문제에 있어서 늘 확실한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눈을 깜빡이며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절대 지강 씨를 몰래 좋아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우린 그저 순수하게 서로 협력하는 관계일 뿐이죠.”
서지강은 묵묵부답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자의 눈빛이 어딘가 묘한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구청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빠를뿐더러 보폭도 컸다.
임가윤은 발목이 아직 아픈 데다가 오래 서 있은 탓에 또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걷다 보니 성큼성큼 걸어가는 서지강의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뒷모습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지강 씨, 잠깐만요!”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짜증스럽게 뒤돌아봤다.
“왜 이렇게 느려. 달팽이도 너보단 빠르겠다.”
임가윤이 막 변명하려는 찰나 서지강이 발걸음을 되돌려 금세 그녀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고는 허리를 감싸 안더니 번쩍 들어 올렸다.
임가윤은 깜짝 놀라 남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단단하고 힘 있는 팔뚝이 그녀를 안정적으로 받쳐 들었고,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근육의 파워풀한 에너지와 가슴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와, 완전 멋있어!”
“여자를 안고 가는 거야? 너무 로맨틱하잖아.”
주변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임가윤의 귓불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두 번의 인생을 살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누군가에게 안겨본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항의하듯 말했다.
“지강 씨, 얼른 내려줘요. 저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남자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마치 그 속도로 언제 도착하겠냐고 말하는 듯 노골적인 무시가 담긴 눈빛이었다.
임가윤은 어이가 없었다.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아예 고개를 단단한 가슴팍에 파묻었다.
어차피 얼굴만 모르면 창피하지도 않은 법이다.
남자의 몸이 움찔했다. 단 몇 걸음 만에 접수창구까지 걸어가 그녀를 의자에 내려놓았다.
구청 직원마저 입꼬리를 씰룩이며 두 사람을 의미심장하게 번갈아 보더니 싱글벙글 웃었다.
“젊은 부부가 정말 사이가 좋네. 자, 여기 서류 작성하세요.”
임가윤은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직원은 신속히 접수를 마쳤다.
행여나 이동할 일이 생겨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면 그는 강철 같은 팔로 주저 없이 번쩍 안아 올렸다.
남자의 품에 안긴 채 민원실을 오가던 중, 임가윤의 머릿속에 발목을 다친 그 날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이틀 전, 술집으로 향하던 길에 문태오는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만 보며 걸어갔다. 결국 빨간불에 건너려다 쏜살같이 달려오는 차를 발견하고 그를 급히 끌어당기면서 발목을 삐끗했다.
하지만 문태오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만 툭 던졌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그러고는 박소혜에게 부축하라고 하며, 정작 본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눈앞의 이 명목뿐인 남편은 성격이 좀 괴팍하고 행동이 거칠긴 해도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