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문태오가 돌아오다
임가윤의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절망에 잠긴 채 눈을 감으려던 순간, 뜨겁고 단단한 손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득해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넓은 품에 안겨 있었다.
“꽉 잡아!”
허리를 번쩍 들어 올리는 동작은 거칠었고, 마치 새끼 고양이를 집어 드는 것처럼 투박했다.
이때, 눈앞에서 무언가 ‘쾅’ 하고 폭발하자 그 사람은 커다란 손바닥으로 머리를 감싸고 온몸으로 막아주었다.
불길이 타오르며 매캐한 냄새가 풍겨왔고, 등 뒤로 뜨거운 열기가 휩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진 건 차갑고 냉정한 기운이었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
짙은 연기에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았지만 임가윤은 애써 부릅뜨고 자신을 구한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려 했다.
소방용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거라고는 짙고 그윽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눈동자 한 쌍뿐이었다.
곧이어 곁눈질로 훑어보자 문태오는 이미 박소혜를 안고 화재 현장을 벗어나 비교적 안전한 공터에 서 있었다.
품에 꼭 끌어안은 모습은 마치 잃어버렸던 보물이라도 되찾은 듯했다. 눈빛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초조함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임가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물이 조용히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온 문태오가 이번 생에서 선택한 사람은 박소혜였다.
반대로 전생에는 그녀를 구하려다 박소혜를 불길 속에 잃었다.
결국 박소혜의 사진을 7년 동안 품에 지니고 밤낮으로 그리워했다.
심지어 다른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갖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순간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 전생의 한을 씻어냈다.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임가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조소를 머금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하늘이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 건 아마도 이 악연을 완전히 끊어내라는 뜻일 테니까.
이제 그녀도 놓아줄 때가 왔다.
짙은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신데다 감정까지 격해져서였을까, 눈앞이 새까매지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어둠에 잠기기 직전, 어렴풋이 문태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임가윤은 어디 있어?”
분명 잘못 들은 거겠지.
지금 마음속엔 온통 박소혜뿐일 텐데 그녀 따위가 안중에 있겠는가?
...
깨어나 보니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
임가윤이 천천히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건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가윤아, 일어났어?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내 몸을 벌떡 일으켜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겨 꼭 끌어안았다.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번 생에 아직 살아계셔서 정말 다행이다.
전생에 문태오와 결혼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부모님은 출장길에 오르셨다가 그만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전용기가 깊은 고산 지대에 추락했고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그 뒤로 오랜 세월 동안 문태오의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위선적인 사랑 말고는 단 한 번도 진심 어린 관심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은 그녀의 배에 쏠렸고, 왜 아직도 아이가 없냐며 수군거렸다.
몸이 아프고 속상한 와중에도 그저 묵묵히 견뎌야 했을 뿐, 어디 털어놓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고, 그럴 때마다 엄마가 이렇게 다시 한번만 안아주면서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다행히 하늘이 그녀를 도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었다.
이번 생에는 절대로 똑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심은숙은 딸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이며 안도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 많이 놀랐지? 다행히 태오가 제때 나타나서 곧바로 뛰어들어 널 구했어. 정말 가슴이 철렁했잖아! 며칠 뒤면 결혼할 텐데 행여나 사고라도 당하면 어떡해?”
임가윤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제 문태오는 분명 박소혜를 먼저 구했다.
그녀는 나중에 다른 사람에 의해 구조되었고, 문태오의 도움은 받지 않았다. 따라서 그 공을 가로채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임가윤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문태오랑 결혼 안 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