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아직도 한 시간이나 더 있어야 한다고 하자 성지우는 아픈 척을 그만두며 도우미에게 에너지를 끌어올릴 수 있는 드링크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원장은 시원하게 원샷한 그녀를 보고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이렇게까지 멀쩡하고 아파하지 않는 임산부는 처음 봤으니까.
한편 레스더는 제국 곳곳에서 범죄를 일으키는 반란 분자들 때문에 오늘도 바삐 돌아쳤다.
“대령님, 로봇 경찰들 수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상부에 인력 요청을 더 해둘까요?”
레스더는 지금 일 처리 때문에 머리가 다 아팠다. 옆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카를 역시 그러했고 말이다.
“대령님, 이의를 제기하실 순 없는 겁니까? 이건 명백한 상부의 압박입니다. 연방에 책임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왜 모든 일 처리를 다 대령님께서 도맡아 하셔야 합니까?”
“지금은 반란 분자들 소탕하는 데만 신경 써. 그다지 간단한 문제 같지 않으니까.”
카를은 아주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일이 터지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저택으로 돌아가셨을 텐데.”
레스더는 저택이란 말에 그제야 오늘이 바로 성지우의 출산 예정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혹시 요 며칠 조용한 게 오늘을 위해서인 건가?’
레스더는 그 생각에 얼른 카를을 바라보며 테온의 행적을 쫓아보라고 했다.
“대령님, 테온은 지금 제국령 안에 없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확인해 봐. 급한 일이야.”
레스더는 카를을 내보낸 후 다시 서류에 집중하다가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자 그대로 제복 외투를 걸치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소장인 가틀릭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가틀릭은 레스더보다 한 살 어렸지만 계급은 그보다 높았다.
“어디 가게?”
가틀릭은 안으로 들어오며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레스더, 너도 알 텐데? 널 눈엣가시로 여기는 노인네들이 많다는 거. 지금 이 상황에 네가 자리까지 비우면 바로 꼬투리 잡혀. 어쩌면 황제 폐하가 네 관직을 박탈하려 들지도 모르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레스더의 눈빛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소장인 내가 꼭 관여해야겠다면?”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눈싸움이 일었다.
그러다 몇 초 후 레스더가 먼저 눈을 피하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갑자기 왜 왔어?”
“너 걱정돼서.”
가틀릭도 담배를 한 대 태웠다.
“너는 어쩜 그렇게 사관 학교에 있을 때와 달라진 게 없어? 누가 조금이라도 누르려고 하면 바로 반발하고. 하여간 귀여운 맛이 없어.”
“그래서 사관 학교 때 나를 그렇게 견제했나?”
레스더의 질문에 가틀릭이 피식 웃었다.
“실력은 엇비슷했는데 맨날 교관들이 너만 예뻐했잖아. 난 가문에서 밀린 거지. 볼찬 가를 누가 이기겠어.”
예전 얘기에 레스더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그때가 네 자존심이 제일 바닥을 치던 시절이었지, 아마?”
“그랬는데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버렸지. 나는 그 뒤로 승승장구했지만 너는 계속 대령에 머물러 있잖아.”
“그래서, 소장 됐다고 자랑하려고 왔어?”
“너 감시하러 온 거야. 오늘 넌 이 자리를 벗어나면 안 돼. 네가 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하이에나들이 네 꼬투리를 잡으려고 할 테니까.”
레스더는 가틀릭의 말에 다시 이성적으로 돌아왔다. 아까는 마치 뭔가 홀린 것처럼 저택으로 당장 뛰어가고 싶었다. 뛰어가서 그녀의 상태도 확인해보고 싶었고 아파하면 곁에 있어 주고도 싶었다.
‘미친놈.’
레스더는 그렇게 스스로를 정의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퇴근까지 얌전히 있어 줄 테니까 이만 가봐.”
“레스더, 이건 진지하게 묻는 건데 요즘 무슨 일 있어? 아니, 요즘이 아니지. 한 달 전부터 그랬으니까. 꼭 내가 아는 네가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봐.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네가 안 하던 짓을 다 하는지.”
안 하던 짓이라면 여자 하나를 위해 상부에 사면장을 신청하고 또 여자 한 명 구하려고 우주 전함을 멋대로 끌고 나갔다가 진탕 욕을 먹고 오늘은 그 여자가 출산 때문에 많이 아파할까 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고 했던 것을 말하는 건가?
레스더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지 피식 웃었다.
“나이가 드니까 생각도 바뀌나 보지.”
가틀릭은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그를 보며 더 캐묻지 않았다.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카를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안으로 들어왔다.
“늘 상관의 방에 이렇게 들어왔나?”
카를은 가틀릭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지 서둘러 경례했다.
그러고는 금세 다시 시선을 돌려 레스더를 바라보았다.
“대령님, 테온이 지금 대령님 저택 근처에 숨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역시.”
레스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저택 주변의 보안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이곳을 나가야만 하는 정당한 이유가 생겼으니 나도 더 이상 관여 안 할게. 노인네들도 뭐라 못 할 거야.”
가틀릭의 말에 레스더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이내 황급히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
저택 안.
[지우 님, 앞으로 정확히 5분 뒤에 아이를 출산하게 될 겁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해 해주세요.]
성지우는 그 말에 조금 당황했다. 원래 살았던 지구에서도 임신 경력은 물론이고 남자친구 한 명 못 사귀어봤으니까.
‘마음의 준비라는 게 뭔데? 난 임신 처음이란 말이야!’
[긴장할 거 없어요. 이따 제대로 힘만 주시면 위험한 상황은 생기지 않을 거예요.]
‘그런 거야...? 알겠어.’
성지우는 이 상황에 의지할 데라고는 시스템밖에 없었기에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했다.
저택 밖.
테온의 손짓 한 번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저택 안의 병사들을 제압했다.
저택 주위에 있던 주민들은 갑작스러운 총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얼른 집으로 피신했고 도로에 있던 사람들도 근처 상가에 급급히 몸을 숨겼다.
테온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저택 담장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저택 안으로 진입하자 어깨에 있는 뱀 문양의 각인이 뜨거워 나기 시작했다.
이 반응은 각인한 반려자가 바로 근처에 있다는 뜻이었다.
성지우 역시 팔에 있는 각인이 갑자기 뜨거워 나는 것을 느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지우 님, 아이 아빠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뭐? 설마 아이를 빼앗으러 온 거야?’
[그건 저도 잘 몰라요. 누군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능력은 없거든요.]
‘하필이면 내 몸이 가장 취약할 때 찾아와? 미친놈, 인정머리 없는 놈! 걸어가다 코나 확 깨져버려!’
테온은 저택 안으로 침입하다 재채기를 두어 번 했다.
원장은 기계에서 들려오는 곧 출산이 임박해있다는 소리에 얼른 소형 마이크로 안에 있는 성지우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아이가 나오게 되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세요. 그리고 언제든지 불편한 거 있으면 얘기하시고요. 알겠습니까?”
“네.”
도우미는 성지우의 옆에 서서 묵묵히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성지우는 배가 사정없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이제 정말 나올 때가 됐구나 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앞으로 10초 뒤에 아이를 출산하게 됩니다.]
성지우는 숫자가 점점 줄어들 때마다 긴장감이 배로 치솟고 두려움 또한 미친 듯이 밀려왔다.
“내가 딱 맞춰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