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그런데 에릭이 기폭 장치에 손을 대려는 순간 테온이 갑자기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생각이 바뀌었어. 그냥 우리끼리 탈출하는 거로 해.”
“네?”
에릭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테온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한번도 결정한 일을 번복한 적이 없었으니까.
테온의 머릿속은 지금 상당히 복잡하고 또 혼란스러웠다.
반란자 연맹이 결정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수인이 그들 가문을 수장으로 섬기며 뜻을 함께했다.
테온은 윌런 가문의 제일 강한 수인으로 그의 아버지는 테온의 이능력에 의존하는 한편 대가 끊긴 것 때문에 몇 번이고 한탄했다. 윌런 가문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들을 전부 다 처단하기 전까지는 절대 대가 끊겨서는 안 됐으니까.
그걸 테온도 잘 알고 있기에 성지우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품은 것이 정말 그의 자식이면 그때는 그 어느 날 그가 죽는다고 해도 그의 자식이 가문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
“가자.”
테온은 결국 에릭과 함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몰래 차에서 뛰어내렸다. 지면에 거의 닿을 무렵 에릭의 지시에 3번 비행차가 그들을 빠르게 태웠다.
테온은 이곳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고개를 들어 우주 전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레스더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매번 테온이 힐턴 제국으로 들어올 때면 레스더는 어김없이 우주 전함을 보냈고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스쳐 가다 결국에는 테온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끝이 났다.
‘조만간 네놈의 고고한 고개를 완전히 꺾어주지!’
...
도우미는 차 문을 열어 병사들이 들어오기 편하게 해주었다.
성지우는 레스더의 얼굴이 보이고서야 긴장을 풀며 편히 침대에 누웠다.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레스더가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다행히 없어요.”
“아니에요, 대령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가 아프다고 하셨어요.”
도우미의 솔직한 발언에 성지우는 괜히 머쓱해져 시선을 슬쩍 피했다.
레스더는 아무 말도 없이 두어 걸음 더 앞으로 다가왔다. 성지우는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어 다시 시선을 돌렸다가 갑자기 몸이 붕 뜨자 깜짝 놀라며 그의 목을 덥석 잡았다.
“깜짝이야! 지금 뭐 하는...”
“얌전히 안겨 있으세요.”
레스더는 그녀를 안은 채로 우주 전함에 들어가더니 곧바로 방음이 잘 되는 조용한 방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이곳에서 편히 쉬고 있어요. 이따 로봇이 들어와 검사를 진행할 겁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레스더가 나가고 곧바로 닥터 로봇이 들어와 그녀의 몸 곳곳을 검사해주었다.
성지우는 편히 몸을 맡긴 채로 있다가 문득 조금 전에 자신을 끌어안았던 레스더의 단단한 팔과 규칙적인 숨소리가 떠올라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심장까지 미친 듯이 뛰는 것이 아주 중증이었다.
‘미쳤나 봐! 빨리 다른 생각해, 다른 생각!’
성지우는 심장 박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시선을 돌려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흐어, 여기서 떨어지면 그대로 즉사하겠네. 으으!’
“심장 박동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대령님께 보고해야겠습니다.”
“뭐?”
성지우가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레스더가 들어왔다.
“어디 다친 곳이라도 있습니까?”
“아... 하하하. 그런 거 아니에요. 방금 창밖을 내려다봤다가 괜히 무서워서... 그래서 심장이 빨리 뛰었나 봐요.”
“환자분의 표정을 분석할 결과 처음에는 쑥스러웠다가 10초 정도 지나고 나서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로봇의 자비 없는 폭로에 성지우는 그대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레스더는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이내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침실을 벗어났다.
‘아아, 미쳤어 진짜! 쪽팔려서 앞으로 레스더를 어떻게 봐!’
성지우는 이불을 끌어 내리며 로봇을 있는 힘껏 째려보았다.
‘검사나 할 것이지 무슨 표정까지 감지하고 그래!’
“검사를 다시 진행해야 하니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로봇이 딱딱하게 말했다.
“네네...”
그 뒤로 우주 전함이 도심에 진입할 때까지 성지우는 계속해서 침실에만 붙어있었다. 괜히 거실로 나갔다가 레스더와 마주치게 될까 봐.
그렇게 계속 가만히 있다 보니 우주 전함은 어느새 레스더의 저택 안에 들어섰고 그녀의 방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성지우는 거실로 나왔다가 레스더를 발견하고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전함에서 내리려는데 레스더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오늘 일어난 일은 도우미 아주머니를 통해 듣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아주머니가 당신을 방에 데려다준 다음에요.”
“네, 알겠어요.”
레스더는 겉모습만 딱딱했지 속은 상당히 섬세하고 부드러운 남자였다. 아무리 임신했다 해도 그래도 범죄자인데 방도 내주고 음식도 제일 좋은 거로 대접해주며 도우미까지 붙여줬으니까.
서재.
레스더는 도우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번에 라우엘을 다치게 했던 킬러가 사실은 성지우를 죽이기 위해 찾아온 거였단 말씀입니까?”
“네, 남자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어요.”
“그 밖에 성지우가 이상한 행동을 보인 건 없습니까?”
“없습니다.”
레스더는 알겠다며 도우미를 내보냈다.
테온이 성지우의 신체검사 결과지를 보게 된 이상 어떻게든 다시 성지우를 데려가려고 할 게 분명했기에 레스더는 성지우가 머무르고 있는 방 주위에 로봇을 더 배치하고 병사들까지 순찰하게 해 의심스러운 자가 보이면 즉시 사살할 것을 명했다.
성지우는 레스더가 도우미를 데려간 것에 별다른 의심은 품지 않았다. 상부에 보고하려면 조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시간이 하루하루 흐르고 성지우는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기 전까지 라우엘과 지속해서 재밌는 영상 같은 것을 주고받으며 연락을 이어나갔다.
반란자 연맹은 그 뒤로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다가온 출산 예정일.
그녀의 인간 신분을 알고 있는 건 레스더를 제외하고 원장밖에 없었기에 레스더는 하루 전에 미리 연락해 원장을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원장은 기기를 매만지며 성지우가 이상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지, 갑자기 출혈이 생긴 건 아닌지 같은 것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지우 님, 이제 곧 출산 준비에 들어가게 됩니다. 통증을 단번에 0으로 만들어드릴 수 있는데 그렇게 해드릴까요?]
성지우는 조금 전부터 슬슬 하반신에 통증이 찾아오던 차에 잘됐다며 얼른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알겠습니다. 3초만 기다려 주세요.]
1,2,3.
3초가 지나자 정말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졌다.
하지만 지켜보는 눈이 있었기에 아픈 척 간간이 인상도 찡그리고 신음도 흘렸다.
[지우 님, 앞으로 한 시간 뒤면 아이를 출산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