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불이 켜지고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자마자 이루나는 심장이 철렁하는 것을 느끼며 흠칫했다.
그녀의 앞에 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서이건이었다.
이루나는 익숙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숨 막힐 듯한 질식감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오늘은 아이를 지운 지 정확히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녀는 30년을 보내는 듯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루나는 지난날을 떠올리자마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해졌다. 아무런 고통도, 아무런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생판 모르는 타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루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는 서이건과 2m 정도 떨어진 곳에 멈췄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존댓말을 한 것도 아닌데도 이상하게 벽이 느껴졌다.
서이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꼭 큰 병에 걸렸다가 완치한 사람처럼 해탈한 듯한 얼굴을 보며 그는 아주 잠깐 눈앞에 있는 여자가 자신이 아는 여자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은 후 불을 끄고 쓰레기통에 꽁초를 버렸다.
이루나는 담배를 다 피운 뒤에도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다시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거 주거침입죄에 해당하는 건 알지? 하지만 이번에는 비밀번호 바꾸는 걸 까먹은 내 책임도 있으니까 신고까지는 안 할게. 하지만 다음은 없어.”
그녀의 말투에는 조금의 분노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읊을 뿐이었다.
서이건은 그녀의 말이 끝난 후에야 소파에서 일어나며 이루나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며 분노에 가득 찬 눈동자를 번뜩거렸다.
“너한테는 복수가 그렇게도 중요해? 나는 네가 복수를 위해 네 뱃속에서 나온 아이를 네 화풀이 도구로 쓸 줄은 몰랐어.”
서이건은 그날 이루나로부터 받은 택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처리해 버렸다. 하지만 다 처리하고 난 뒤에도 피로 가득 물든 핏덩이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루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링크를 복사하려면 클릭하세요
더 많은 재미있는 컨텐츠를 보려면 웹픽을 다운받으세요.
카메라로 스캔하거나 링크를 복사하여 모바일 브라우저에서 여세요.
카메라로 스캔하거나 링크를 복사하여 모바일 브라우저에서 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