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서이건이 몸을 숙여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이루나, 내 말이 우스워?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거기까지 찾아와서 난리를 쳐?”
이루나는 어리둥절하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도대체 누가 웃기는 거지? 거긴 내 생물학적 아버지 집이고, 그리고 여긴 내 아파트야!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영역을 침범한 건 이건 씨잖아? 주거침입으로 신고라도 해줄까?”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어느새 크고 위압적인 몸이 바짝 다가왔고, 늘씬한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나랑 이씨 가문의 관계를 안 이상 우리 얘긴 입도 뻥끗하지 마.”
그리고 서슬 퍼런 눈빛으로 경고했다.
“특히 이은서 앞에서는 더더욱.”
이루나는 커다란 손에 턱을 붙잡힌 채 수정처럼 맑은 눈동자로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겁먹기는커녕 오히려 눈썹을 치켜올리며 도발적으로 되물었다.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을 누설하면 안 되려나? 당신이랑 잤다는 거? 아니면...”
서이건은 화가 나서 손아귀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갔다. 이대로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하지만 꾹 참고 그녀를 놓아주더니 발코니로 걸어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짙은 연기를 내뿜으며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보였다.
이루나는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 앉았다. 조금 전 그가 보였던 격한 반응을 떠올리곤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은서라는 약혼녀가 꽤 중요한 존재인가 보군.
아니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이 그녀가 집에서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쫓아올 리 있을까?
그녀는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이때,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연락을 주고받던 남자한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밤 같이 야식이나 먹을래?]
아이디는 [태준]이라고 저장되었다.
이루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초대에 응했다.
곧이어 복잡했던 감정을 떨쳐내고 남자를 향해 다가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가주시지? 이따가 나가봐야 하니까 당신이랑 놀아줄 시간 없어.”
그리고 발코니 유리창에 몸을 기대며 냉소를 지었다.
“우린 이미 돈 받고 끝난 사이잖아?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이건 씨가 누구랑 결혼하든 관심 없거든? 난 이제 데이트하러 가야 해. 자, 출구는 저기야.”
분명 구구절절 한참을 말했으나 서이건의 귀엔 오직 ‘데이트’라는 단어만 또렷하게 들렸다.
이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분노와 조롱이 뒤섞인 눈빛으로 말했다.
“벌써 다음 타자 찾은 건가?”
“응.”
이루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이번에는 귀여운 연하남이야. 재벌 2세에다가 키도 크고 몸도 좋아. 이건 씨 보다 족히 열 살은 어릴걸? 머리부터 발끝까지 에너지가 넘쳐흐르거든.”
서이건은 담배만 연신 빨아대더니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기분이 갑자기 바닥을 쳤다.
정작 자신조차 왜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단 하나,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당장이라도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는 것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이유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니 점차 오장육부로 번져갔다.
이때, 이루나의 휴대폰에서 다시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상대는 그녀에게 어디서 만날지 물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천연덕스럽게 음성 메시지로 답장했다.
“아무 데나. 네가 정해. 우리 저번에 갔던 바도 괜찮던데? 이따가...”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이건이 갑자기 손을 뻗어 휴대폰을 확 낚아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휴대폰은 쓰레기처럼 몇 미터 떨어진 휴지통에 처박혔다.
넋을 잃은 이루나는 뒤늦게 상황 파악하고 본능적으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 미친놈 아니야?”
그리고 무의식중으로 휴대폰을 주우러 가려 했지만 발을 내딛기도 전에 서이건의 거친 손이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다시 소파에 내동댕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