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그 말을 들은 육시훈은 차 키를 들고 그녀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거절했지만 기어코 데려다주겠다며 휠체어를 밀고 문밖으로 나섰다.
“혼자 두는 게 불안해서 그래. 앞으로 어디든 가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뭘 하고 있든 꼭 데리러 올게.”
임유라는 거절할 수 없었다. 이제 장애인인 그녀는 거절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극단에 도착하자 그녀는 혼자 원장을 찾아가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원장은 매우 안타까워하며 위로의 말을 잔뜩 늘어놓은 후에야 사직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그 순간 소은하가 들어와 웃는 얼굴로 서류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소은하입니다. 오늘부터 출근하기로 했어요.”
“은하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젊은 나이에 수석으로 우리 극단에 합류하다니 정말 대답하십니다...”
나가려던 임유라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다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경인시에 갓 온 소은하가 그녀의 자리를 이어받아 극단의 수석이 되었다니.
더는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던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휠체어를 밀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때 뒤따라온 소은하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라 씨, 시간 되면 얘기 좀 할까요?”
그녀와 대화할 생각이 없었던 임유라는 휠체어를 돌리려 했지만 소은하가 손을 뻗어 휠체어를 붙잡았다.
“그렇게 피하지 말아요. 사실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 있어서요. 시훈이가 그러더라고요. 춤을 정말 잘 추는 여동생이 있다고요. 첫 출전에서 도화컵 금상을 탔고, 졸업하자마자 국립무용단의 수석이 됐다더군요. 전 경인시에 온 이유가 시훈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천재 무용수를 한번 보고 싶어서였어요.”
“하지만 하늘이 시기한 건지 그렇게 재능 있는 분의 다리가 이렇게 되다니. 이제 우리는 같은 무대에 설 일은 없겠네요.”
안타까운 듯한 말투였지만 임유라의 귀에는 비웃음처럼 들렸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딱히 질문이 없다면 전 그만 갈게요.”
그녀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알아챈 소은하는 더욱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바로 나와 시훈의 관계예요.”
“시훈이는 어릴 적부터 나를 지켜줬어요. 다섯 살 때 우리 동네 남자애들이 나를 괴롭히면 맨몸으로 싸우러 갔고, 매일 등하교를 함께 했죠.”
“날 웃게 해주려고 별의별 깜짝 이벤트도 다 준비했는데 나중에 시훈의 엄마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이 경인시로 이사 가면서 자주 못 보게 됐어요. 하지만 매주 편지도 보내고 전화도 몇 통씩 하며 여기에서의 생활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줬어요.”
“대회가 있으면 반드시 현장에 와서 응원해줬는데 7, 8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어요. 주변 사람들은 다 그 시훈이가 아직도 나를 좋아한다는데 본인이 고백을 안 해서 진짜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유라 씨는 시훈이의 여동생이니까 알 것 같아서요. 어떻게 생각해요?”
소은하는 진심으로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임유라의 심장은 마치 칼에 찔린 듯 아팠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거예요.”
소은하는 그녀의 시큰둥한 대답에 살짝 웃음을 흘렸다.
“역시 유라 씨도 모르고 있었군요. 뭐, 당연하겠죠. 친남매도 아닌데 어떻게 유라 씨한테 솔직하겠어요. 이것 말고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사실 내가 경인시에 온 건 시훈이 초대 때문이에요. 한 달 전부터 국립무용단 수석 자리를 제안받았거든요. 반드시 자리가 비게 될 테니 준비하라고 말이에요. 시훈이는 어떻게 유라 씨의 사고를 미리 알았던 걸까요?”
임유라는 육시훈이 그 사고를 계획한 것이 단순히 복수를 위해 자신의 꿈을 짓밟으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결국 소은하를 위한 것이었던 걸까.
한순간 그녀의 흔들리던 마음은 갑자기 끝없는 심연으로 추락했다.
‘육시훈, 네가 나를 이렇게까지 속이다니.’
황망함과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들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휠체어를 밀어 떠나려 했다.
하지만 소은하는 죽을힘을 다해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러 앞으로 넘어지면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임유라와 함께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은하야!”
마침 그녀를 찾으러 온 육시훈이 이 장면을 보고 황급히 달려와 소은하가 떨어지기 전에 그녀를 끌어안았다.
홀로 남은 임유라는 높고 단단한 돌계단을 따라 굴러떨어졌다.
“아...”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찢어지고 온몸이 멍들었다.
이마에는 끔찍한 상처가 생겨 피가 샘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팠고 몸은 핏물 속에서 경련하며 꿈틀거렸다.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육시훈이 무사하지만 놀란 소은하를 안고 부드럽게 달래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