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22화
유정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럼 이 집 나한테 임대해. 당분간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여기서 회사도 가까우니까.”
조백림은 놀란 눈으로 유정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살겠다고?”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스트룸만 쓰면 돼. 한 달 뭐 이렇게 길게 머물 것도 아니니까 월세는 뺴고. 대신 내가 머무는 동안 청소비나 관리비, 수도세 전기세 같은 건 다 내가 부담할게.”
백림은 가볍게 웃었다.
“우리가 남이라도 아니고, 술도 같이 마신 사이인데 이런 거 따질 필요 있을까? 편하게 있어. 얼마를 살든 상관없어.”
유정은 감사의 뜻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
백림은 눈빛을 가늘게 좁혔다.
“네 가족이 널 혼자 내보내 줄까? 필요하면 내가 대신 얘기해줄게.”
유정은 손에 쥔 숟가락을 꼭 쥐고 씩 웃었다.
“필요 없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백림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유정은 직접 운전해 유씨 저택으로 향했다.
거실에는 할아버지 유지태와 할머니 신화선, 그리고 부모님 유탁준, 서은혜 모두 모여 있었다.
조엄화도 하품하며 2층에서 내려오자, 신화선은 재빨리 물었다.
“신희는 어때?”
지엄화가 답했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자서 이제야 겨우 잠들었어요.”
신화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잠들었으면 다행이네.”
그러고는 서은혜를 돌아보며 말했다.
“유정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어제 내가 분명히 늦게 다니지 말라고 얘기했는데, 밤늦게 들어와서 개 짖고, 신희 잠 다 깨고, 결국 오늘 심장 더 안 좋아졌잖아.”
서은혜는 고개를 떨구며 변명했다.
“유정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회사에 일이 있어서 늦게 끝난 거예요.”
신화선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맨날 회사 핑계야. 결혼도 얼마 안 남았는데 아직도 회사일에 그렇게 매달려? 혹시 유정이가 조씨 집안으로 갈 때 회사까지 가져가려는 거 아냐?”
서은혜는 얼굴이 굳어졌다. 처음으로 차분하지만 단단하게 맞받아쳤다.
“우리 회사는 한때 위기에 빠져 거의 망할 뻔했어요. 그걸 유정이가 혼자 버텨냈고, 지금 이렇게 살려낸 것도 유정이 덕분이에요.”
“유정이가 결혼하든 안 하든, 그 회사는 유정이 거예요.”
지엄화는 남편과 눈을 마주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너무 심하지 않아? 회사가 힘들 때 우리도 도와줬잖아.”
서은혜는 냉랭하게 말했다.
“고객 뺏어가면서 도운 거 말이야?”
지엄화는 잠시 머쓱했지만,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객을 잃으면 회사가 더 힘들어지잖아. 우리가 막아준 거야.”
서은혜는 말끝을 흐리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그게 누군가한테는 구멍을 더 키우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생각 안 했겠죠.”
신화선이 급히 두 사람의 말을 끊었다.
“그만해. 이런 옛날얘기 꺼내서 뭐하니? 지금은 유정이 문제나 해결해야지.”
신화선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유정이가 매일 늦게 들어오는 걸 어떻게 할 건데? 신희는 이대로 계속 견딜 수 없어.”
“할머니!”
그때 유정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저희 부모님 뭐라 하지 마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 최근 회사가 바쁜 건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다른 가족분들 휴식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으니 제가 나가서 살게요.”
거실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유정에게 쏠렸다. 표정은 모두 놀라움 그 자체였다.
“나가서 살겠다고?”
서은혜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건 안 돼!”
유정은 단호하게 말했다.
“백림 씨가 가진 망강 아파트에 공실이 있어요. 회사에서도 가깝고, 차로 10분이면 가요. 늦게 들어와서 민폐 끼칠 일도 없고,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서은혜는 백림의 집이라는 말에 그나마 긴장을 풀었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래도 혼자서 괜찮겠어? 누가 너 챙겨 줘?”
“괜찮아요. 집안일은 도우미가 오고, 식사는 회사 근처에서 해결하면 되고요. 예전에 학교 다닐 때도 다 혼자 했어요.”
지엄화는 입술을 삐죽이며 빈정거렸다.
“이제 사실상 동거네?”
유정은 단단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요. 그 사람은 거기 살지 않아요.”
유지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유정이가 이렇게까지 생각했으니 따르자고.”
유지태는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밖에서도 항상 조심해라.”
유정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