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47화
유정은 이미 화가 날 지경이었고, 말투도 점점 딱딱해졌다.
“근데 정서니 씨, 무슨 일이죠?”
서니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사촌 오빠 보러 왔어요!”
유정은 냉정하게 받아쳤다.
“여기엔 안 없어요. 원래 자주 오는 사람도 아니고요. 잘못 찾아오신 거 같네요.”
서니는 비꼬듯 유정을 훑어보며 눈을 크게 떴다.
“여기 살면서도 오빠가 잘 안 오는 거면, 그쪽은 오빠한테 아무 매력도 없다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왜 그렇게 당당한 건데요?”
유정은 그 말에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화가 났다.
“오빠를 보고 싶으면 오빠 집으로 가세요. 더 이상 저희 시간 뺏지 마시고요.”
서니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가요, 가요! 누가 여길 그렇게 좋아한다고!”
그러면서도 느릿느릿 나가는 모습이 유정은 도무지 참기 힘들 정도로 거슬렸다. 속으로는 뒷덜미라도 잡아 끌어내고 싶었다.
서니가 떠난 직후, 조백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어디야? 나 지금 오빠 집 근처 지나가다가 불이 켜져 있어서 오빠 있는 줄 알았지 뭐야.”
백림은 술자리에 앉아 있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너, 들어갔어?]
“응. 오빠 약혼녀 있더라.”
백림은 순간 이마를 찌푸렸다. 서니의 성격을 너무 잘 아는 그는 혹시 유정을 곤란하게 하진 않았는지 걱정부터 앞섰다.
[유정이랑 마주쳤어?]
“그럼. 봤지!”
서니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가 왜 그 사람 안 좋아하는지 알겠어. 완전 차갑고 말도 별로야. 큰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눈으로 그런 사람을 약혼녀로 정한 거야?”
백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잇지 못하자 서니는 한술 더 떴다.
“게다가! 그 여자, 오빠 집에서 딴 남자 숨겨두고 있었어!”
백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니가 떠난 뒤, 유정도 어색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미안해요. 그 사람은 제 약혼자의 사촌 동생인데, 말버릇이 좀 그래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안성도 쭈뼛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민폐만 안 끼쳤으면 다행이에요.”
유정은 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일 없어요.”
그러고는 문서를 들고 식탁 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는데, 곧바로 일에 몰입하는 듯한 태도였다.
안성도 유정의 맞은편에 앉아 함께 문서를 검토했지만, 시선은 자꾸 유정에게 향했다.
업무 복장을 입고 당당히 회의실을 걸어 다니던 그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도 멋졌지만, 지금은 편안한 차림으로 집에 있는 모습, 길게 뻗은 속눈썹과 부드러운 옆선이 어우러져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유정은 그 누구보다도 멋지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기에 더 안쓰러웠다. 그런 여자가 왜 이렇게까지 혼자서 모든 걸 버텨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안성은 무심결에 말했다.
“사장님 곁에서 일할 수 있어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유정은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담담히 말했다.
“열심히 하면 회사는 분명히 알아줄 거예요.”
그 한마디에 안성은 등에 날개라도 달린 듯 등을 쫙 펴고 말했다.
“네!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백림이 집에 들어섰을 때, 식탁 맞은편에서 서로 고개를 맞대고 문서를 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백림은 현관 옆 수납장에 몸을 기댄 채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특유의 무심한 침묵 속에 뭔가 싸늘한 기류가 번졌다.
유정이 고개를 들어 백림을 보자, 잠깐 놀란 눈빛을 내비쳤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래 초인종도 안 누르고 들어오지’
안성은 백림을 보고 순간 움찔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 조백림 사장님!”
백림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지만, 눈빛만큼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업무 처리 중인가 봐요?”
안성은 당황한 듯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챙기며 말했다.
“서명받을 문서가 있어서 잠깐 들렀어요.”
백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정 쪽으로 다가갔다. 유정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상체를 숙이며 그녀가 보고 있던 문서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 빨리 끝내. 방에서 기다릴게.”
백림의 숨결이 귓가를 스치듯 전해졌고, 목소리에는 어딘가 묘하게 깊은 울림이 담겨 있었다.
그 말에 유정은 순간적으로 몸을 살짝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