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55화
“내가 유신희처럼 남동생이라도 있었다면, 집안일에 얽매이지 않고 내 꿈을 마음껏 좇았을 거야.”
“하지만 나는 외동딸이야.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부모님은 작은 아빠네한테 끝없이 짓밟히고 밀려날 거고.”
유정의 말에 조백림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유정의 부모는 부드럽고 어딘가 나약했기에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유정의 부모님은 유정의 강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저토록 독하게 살아가는지, 왜 신희처럼 유순하게 굴지 못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백림은 손가락으로 입술 가장자리에 묻은 술을 닦아내며 물었다.
“그 주준이라는 사람이랑 직접 만난 적 있어?”
유정은 바로 대답했다.
“아니? 앞으로도 만날 일 없을 거야.”
백림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근데 만약에 만나게 됐는데, 그 사람이 젊고 잘생기고, 재능 있고, 너랑 성향까지 잘 맞는다면 좋아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유정은 코웃음을 쳤다.
“그만 좀 해. 첫째, 만날 일 없어. 둘째, 나는 판타지에 빠지는 타입 아니거든. 셋째, 주준은 나보다 나이도 많을걸? 결혼도 했을 수도 있고.”
백림은 유정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진짜로 결혼 안 했고, 너한테 관심을 보인다면? 어떻게 할 건데?”
이건 단순한 사랑의 선택이 아니라,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선택이기도 했다. 만화를 그리며 자유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집안을 위해 돌아갈 것인가의 문제였다.
유정은 진지한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그러면 좀 고민해 봐야겠지.”
백림은 갑자기 몸을 숙여 유정을 소파와 팔 사이에 가둬버렸다.
남자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어두웠고, 차가운 미소가 입가를 스쳤다.
“네가 날 버리고 가겠다고? 그럼 나는 널 망가뜨릴 거야. 네 회사를 무너뜨리고, 네 부모를 거리로 내쫓아서,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게 만들어줄 거야.”
유정은 숨이 멎을 듯 놀라 그를 올려다봤고, 잠시 뒤, 조용히 물었다.
“그럼 나, 조건 하나 걸어도 돼?”
백림의 눈빛이 흥미롭게 빛났다.
“말해 봐.”
“그럼 신희네 회사도 같이 무너뜨려 줘. 걔도 같이 길바닥에 나앉게.”
백림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럴 순 없지. 우리가 헤어져도, 약혼은 그대로야. 결국 내가 결혼할 사람은 유신희니까.”
“그리고 걔랑 너희 집안 몰락을 같이 지켜볼 거야. 걔는 널 어떻게 밟아주는지 곁에서 즐길 거고.”
유정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백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악랄하네.”
이에 백림은 유정과의 거리를 더 좁히며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날 배신하지 마.”
그 말에 유정은 마치 자신이 그 상황에 놓인 것처럼 몰입해 버렸고, 눈이 이글거리며 벌떡 다리를 들어 백림을 밀쳤다.
“우린 계약 관계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끝낼 수 있어. 그런 걸로 날 묶을 생각 마!”
그러나 백림은 유정의 다리를 쉽게 제압하며 웃었다. 두 사람 모두 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그의 키와 체격은 명백히 위협적이었다.
“유정아, 아직도 세상을 순진하게 보네? 두 집안이 맺은 약혼이 그렇게 간단한 줄 알아?”
유정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백림의 눈빛은 차가운 경고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만화는 그냥 취미로 해. 진지하게 빠지지 말고.”
유정은 눈을 끔뻑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비웃었다.
“그럼 네가 밖에서 만나는 여자들도 다 그런 취급이야? 진지하지 않으면 다 놀잇감이야?”
백림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가 컨트롤할 수 있으면 그렇지.”
유정은 분노에 치를 떨며 몸부림쳤고, 소파에 있던 쿠션을 들어 그의 가슴팍에 마구 던졌다.
하지만 백림은 유정의 손목을 잡아챘고, 그녀는 곧 바닥에 눕혀졌다.
백림의 크고 단단한 몸이 유정을 완전히 눌러왔고, 하필 유정의 허리 아래엔 쿠션이 깔려 있어서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유정은 이를 악물고 다시 다리를 들어 백림을 밀쳤다.
“조백림, 나 원래 말 안 듣는 성격이야. 누가 막을수록 더 부딪치고 싶어져. 부서진다고 해도 상관없어!”
백림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딪쳐보든가.”
남자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고, 유정은 거친 숨을 내쉬며 그 눈빛에서 결코 장난이 아님을 알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