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65화
책상 위에는 전부 불경뿐이었고, 이런 고요하고 엄숙한 공간에서 조금 전의 일은 정말 체면 없는 일이었다.
백림은 유정을 일으켜 세우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자, 이제 경전 쓰러 가, 자기야!”
유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넌?”
백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분명 네가 자청한 일이잖아?”
유정은 억울한 듯 말했다.
“그럼 넌 먹이라도 갈아.”
이번엔 백림도 반대하지 않고, 다정하게 말했다.
“좋아, 우리 유정이 위해서 먹 갈아주지.”
유정은 백림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으나, 백림이 일어나자 유정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정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가 바라보는 것을 느끼자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섰다.
백림이 먹을 가는 사이, 유정은 다시 서재를 둘러보았다.
책장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이 꽂혀 있었고, 고전 명작 소설만 해도 여러 나라 언어로 된 버전이 있었으며, 하나같이 읽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책 사이엔 독서 노트가 있었는데, 그 필체는 단정하고 세련되어 주윤숙이 쓴 경전의 글씨체와 똑같았다.
유정은 얼핏 보기만 해도 주윤숙이 최소 5개 국어가 능통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속으로 주윤숙은 정말 놀라운 사람이라고 감탄했다. 이렇게 폐쇄된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 감정이 몰려오자, 유정의 마음 깊은 곳에도 알 수 없는 공허함이 퍼졌고, 방금까지의 설렘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뒤돌아보니, 백림은 책상 앞에 앉아 먹을 갈고 있었다.
남자의 자세는 대충 기대앉은 듯했지만, 긴 팔과 손가락 골격이 모델 뺨쳤다.
백림이 먹을 갈고 있는 모습은 방탕함 속에서도 묘하게 우아했다.
그 옆모습은 주윤숙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유정은 조용히 책상 앞으로 가, 붓글씨용 화선을 펴고 문진으로 눌렀다. 경전을 펼쳐 주윤숙이 쓰다 만 부분을 찾은 뒤, 붓을 고르기 시작했다.
백림은 그런 유정을 슬쩍 보고 웃으며 말했다.
“꽤 그럴듯하네.”
유정은 바른 자세로 앉아 붓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나 글씨는 유신희랑 같이 배웠어.”
“우리 유정이는 똑똑하니까, 당연히 더 잘 썼겠지!”
유정은 백림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말했다.
“보는 눈은 있네.”
“당연하지.”
백림은 으쓱하며 눈썹을 살짝 들었다.
그가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자 유정은 순간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정신을 바짝 차리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유혹당하지 마!’
그 후로는 더 이상 백림과 말을 섞지 않고, 붓에 먹을 묻혀 조용히 필사를 시작했다.
백림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꽃차 한 잔을 가져와 유정 옆에 내려놓았다.
그는 경전은 도저히 쓸 수 없었고, 다시 잠들 수도 없어 책을 한 권 꺼내 유정 맞은편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유정은 몰입해 조용히 글씨를 쓰고, 백림은 느슨하게 책장을 넘겼다.
가을 오후의 서재는 고요했다.
정원 너머에서 들려오는 벌레 소리가 들렸고, 햇살은 부드럽게 방 안으로 스며들었으며, 향이 가늘게 피어올랐다. 먹 내음과 햇살이 뒤섞여 평온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백림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유정을 바라보았다. 곧게 편 허리, 단정한 자세, 아래로 살짝 떨어진 눈동자, 햇살이 유정의 턱선에서 코끝까지 부드럽게 흐르며 맑고 단아한 기운을 더했다.
유정의 얼굴을 몇 초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잔잔한 바람, 따사로운 햇살, 문득 이게 진짜 평화란 건가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백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다시 책장을 넘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후 내내 서재에 머물렀다.
해 질 무렵, 유정은 마지막 남은 경전을 다 써냈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백림은 다가와 유정의 어깨를 주물렀는데, 손놀림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고 딱 좋았다.
하지만 유정은 온몸이 오히려 더 긴장해버려, 백림을 밀어내며 말했다.
“만지지 마, 네 온몸에 속세의 기운이 가득해.”
백림은 웃음을 터뜨렸다.
“경전 하나 썼다고 완전 득도라도 한 줄 알겠네!”
해 질 무렵 햇살이 유정의 얼굴을 감쌌고, 여자의 이목구비는 더욱 또렷하게 빛났으며, 그녀는 맑은 눈으로 말했다.
“진짜로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 기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