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4장
서정희는 눈앞의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염정훈이 화낼 줄 알고 화풀이를 받아들일 준비까지 했다.
웬걸 염정훈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 화를 내지 않았다. “이해했어. 결국 너는 나쁜 년을 자처하겠단 거네.”
지난 날의 그녀는 항상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었다. 더이상 어떠한 관계에 자신을 가두어 두고 싶지 않았다.
애인이라면 책임질 필요도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만하고 싶을 때 바로 그만둘 수 있었다.
더는 염정훈과 과거의 미래의 일로 골머리를 앓을 필요도 없었다.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토록 평화로울 수 있는 일이었다.
다 제 업보였다. 염정훈은 백지연이 강제로 결혼하려고 할 때 서정희를 놓지 못해 서정희에게 애인의 신분으로 제 곁에 있어 달라고 했던 부탁을 떠올렸다.
오늘날 이렇게 자신이 되려 서정희에게 명분을 달라고 매달릴 줄은 몰랐다.
설령 서정희가 애인이란 이름표를 주더라도 자신은 감지덕지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서정희와 더 가깝게 지낸다면 언젠가는 다시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서정희는 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쓸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네 선택은?”
지금 그들은 이미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염정훈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자기야, 이제부터 난 네 꺼야. 목숨도 네 꺼야. 그러니까 뭐든 괜찮은데 나 버리지만 말아줘.”
서정희는 까칠한 수염을 갖고 놀았다. “근데 난 명분을 줄 수도 없고 내가 뭐하는지 일일이 보고하지도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오늘 누굴 만나고 내일 누구와 뭘 하는지 얘기 안 할 거란 뜻이야. 우리 서로 사생활 터치하지 말자고. 오케이?”
질투가 심하고 소유욕이 강한 염정훈이 이런 조건을 받아 들일리가 없었다.
“정희야, 네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나도 한가지 조건이 있어.”
“얘기해.”
“다른 남자랑 관계 갖지 말고 네가 원할 때 언제든지 나한테 연락해.”
이게 바로 그의 유일한 조건이자 마지노선이었다.
자신을 성욕이 강한 사람처럼 얘기하자 서정희는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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