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9장
오래전에 그는 서정희와 약속을 했다. 함께 가장 높은 산에 올라 일출을 보자고.
그런데 당시는 너무 바빴기에 함께 가고 싶었어도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 약속은 이제 영영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되어 버렸다.
정희야,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늘이 나를 벌하는 건가 봐? 죽기 전에 당신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게.
그는 연로한 노인처럼 천천히 자신의 머리를 돌렸다. 실명은 눈앞이 흑암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색채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염정훈은 아무런 색채가 없는 세계에서 금빛을 어렴풋이 보는 것 같았다.
일출이겠지.
햇빛은 눈을 자극해야 마땅한데, 전혀 자극이 없이 그저 필터 하나 추가한 듯했다.
바람에 곧 꺼져갈 불빛처럼 미세하고 희박했다.
바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입을 열어 말한 것 같은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딸랑, 딸랑.
청력을 완전히 잃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방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소희다.
염정훈은 몸을 돌려 느낌으로 소희가 있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온몸이 떨렸다.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도 그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사치였다.
다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죽는 순간에 옆에 자녀가 하나 없는 게 하늘의 뜻인 가보다.
소희는 서정희를 닮은 아이었기에 자신의 딸이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소희를 안아보고 싶었다.
독이 차츰 그의 몸속 기관들을 침식하고 있었다. 다만 사람은 놀랄 만한 잠재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진상정은 너무 울어서 눈이 팅팅 부었다.
“대표님 지금 뭐하려는 거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둬.”
진영이 진상정을 막아 나섰다.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눈물을 훔쳤다. 다만 염정훈은 더 이상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그는 두 무릎이 심하게 떨렸다. 작은 동작 하나 하나에 그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정훈은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 아이는 빛 가운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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