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한때는 오만하기만 하던, 태연하게 모든 상황을 처리하던 배수혁의 입에서 이런 말을 나오니 황당하면서도 씁쓸했다. 이건 배수혁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제일 비굴한 만류였다.
이 말에 성아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수혁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역겨움도 조롱도 연민도 아닌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철저한 고요함이었다.
성아린은 아직도 집념에 사로잡혀 정신을 못 차리는 배수혁을 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맡으로 걸어가 헝클어진 이불깃을 정리해 줬다. 동작이 부드러웠지만 아까 입술을 적셔줬던 것과 다를 것 없이 거리감이 느껴졌다.
“배수혁.”
성아린이 마지막으로 배수혁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끝을 알리는 심판을 내렸다.
“잘 지내.”
그러더니 더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려 꿋꿋하게 병실을 나섰다. 하이힐이 바닥에 부딪히며 상큼하면서도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무너져 내리는 배수혁의 마음을 지르밟는 것 같았다.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배수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고 잡힌 건 차가운 공기뿐이었다.
성아린의 모습이 사라지고 문이 서서히 닫히자 배수혁의 시야도 그만큼 좁아졌다. 이제 이 이곳에 남은 건 현실을 벗어난 허황한 꿈뿐이었다.
병실은 배수혁의 거칠면서도 가쁜 숨소리와 의료기기가 내는 규칙적인 신호음밖에 없었다. 햇빛은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밝았지만 삭막한 배수혁의 마음까지 비춰주지는 못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새 5년이 훌쩍 지났다.
오인리의 비헨나, 휘황찬란한 금빛 공연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늘은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린 피아니스트 성아린의 글로벌 순회공연 마지막 날이었다.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음악의 향연이라 많은 인파가 현장에 몰렸다. 그리고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앉은 두 사람이 보였다.
핏이 좋은 짙은 슈트를 입은 배수혁의 얼굴에는 세월이 남긴 흔적이 여럿 보였다. 이제 오만함과 날카로움은 옅어지고 침착함과 노련함이 돋보였다. 배수혁의 옆에는 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앉아 있는데 이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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