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성아린은 병원에서 한 주를 더 보냈다. 그 한주간 성아린은 영혼이 없는 목각인형처럼 제때 식사하고 밥 먹고 치료를 받았다.
멘털이 무너질 법도 한데 울지도 난리를 피우지도 않는 데다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가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바꿔주면 침대에 누우며 협조했고 도우미가 밥을 가져오면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기계적으로 입에 가져다 넣었다.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았던 아픔도 이제는 공허함으로 가득 채워진 것 같았다.
퇴원하는 날, 날씨는 어두운 먹구름이 낮게 깔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음침했다. 혼자 퇴원 절차를 마친 성아린이 병원 앞에서 차를 부르려는데 익숙한 롤스로이스 한대가 천천히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열리자 우아하면서도 차가운 배수혁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조수석에는 지수아가 타 있었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선 성아린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배수혁은 몰라보게 수척해진 성아린의 얼굴을 보고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표정을 정리하고는 보호하듯 지수아를 감싸안았다.
“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배수혁의 목소리는 마치 날씨처럼 엉망이었다. 성아린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갈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지수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얼른 타요. 밖에 추워요. 내가 수혁이 겨우 설득해서 데리고 온 거예요. 오해가 많은 것 같은데 수혁이 너무 미워하지 말고요.”
이 말에 지수아를 바라보는 배수혁의 눈빛이 더 부드러워졌다. 다만 그 시선이 성아린에게로 옮겨졌을 때는 의심할 여지 없이 딱딱하기만 했다.
“수아가 부탁하지만 않았어도 여기 올 일 없었어. 성아린, 수아가 어떻게 하는지 봐. 너는 또 어떻고. 내가 말했지. 수아는 내 약점이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사모님이라는 신분에만 집중해. 수아 어떻게 할 생각은 말고.”
사모님이라는 신분에 집중하라니, 성아린은 그 말이 너무 우스웠다. 이제 더는 이 남자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성아린은 차를 지나쳐 자리를 떠나려 했다.
“성아린.”
차에서 내린 배수혁이 성아린의 손목을 잡았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성아린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만하고 얼른 타.”
인내심을 잃은 듯한 목소리는 성아린의 행동을 투정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몸부림 쳐봐도 배수혁이 너무 꽉 잡은 탓에 금방 퇴원한 허약한 몸으로는 절대 뿌리칠 수가 없었다. 결국 배수혁은 성아린을 욱여넣다시피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안정적으로 내달리는 차 안에서 성아린은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앞좌석의 애정행각을 일부러 무시했다.
지수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배수혁에게 애교를 부렸다.
“수혁아, 어젯밤에 조금 추운 것 같더니 감기 걸린 것 같아. 머리가 어지러워.”
배수혁이 얼른 지수아의 이마를 짚어보며 성아린은 들어본 지 오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이따 가정주치의 연락해서 들르라고 할게.”
“아니야. 괜찮아. 잠을 설쳤나 보지.”
지수아가 배수혁의 팔에 살포시 기댔다. 배수혁은 밀어내지 않고 지수아가 기대기 편하게 자세를 조정했다.
성아린의 바늘이 파고드는 듯한 고통에 몸이 움츠러들 지경이었다. 언젠가 성아린도 기침 한방이면 배수혁이 바짝 긴장하면서 밤새 간호하며 직접 약을 먹여줬는데 지금은 모든 걱정과 부드러움을 다른 여자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그때 지수아가 외마디 감탄을 뱉어내며 창밖을 내다봤다.
“갑자기 웬 비? 수혁아. 아침에 베란다에 옷을 그대로 걸어두고 왔는데 어떡하지. 제일 좋아하는 잠옷이란 말이야...”
비가 후드득 창문에 떨어지더니 이내 장막처럼 앞을 가렸다. 배수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향을 틀어 차를 한편에 세우고는 뒷좌석에 앉은 다소 창백한 표정의 성아린을 돌아봤다.
“차 잡아서 돌아가. 수아 옷 거두게 집에 데려다줘야겠어.”
성아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배수혁을 올려다봤다.
‘육교에서 비 오는 날에 혼자 차 잡아서 가라고?’
배수혁은 문제가 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가만히 있는 성아린을 재촉했다.
“안 들려?”
지수아도 고개를 돌리고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세히 보면 우쭐대고 있었다.
“사모님, 미안해요... 내일 내 생일이라 수혁이가 더몽 레스토랑에 자리를 예약했거든요. 저번 일도 그렇게 제대로 화해하고 싶어서 세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나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꼭 와야 해요.”
성아린은 대답하지 않고 차 문을 쾅 닫았다. 까만 세단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다른 차들과 함께 비속으로 사라졌다.
육교에 선 성아린은 빗물이 눈을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차를 잡고 싶었지만 멈춰서는 차는 없었다. 빗물이 옷을 적시자 한기가 뼛속을 파고 들어가 너무 시렸다.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성아린은 육교를 따라 비틀거리며 집 쪽으로 걸어갔다.
별장에 거의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폭삭 젖어 이가 덜덜 떨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날 밤 약속이라도 한 듯 찾아든 고열이 성아린의 의식을 앗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