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임지유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 안에는 차현우가 원피스를 잡아당기는 순간부터 그 뒤의 난폭한 장면까지,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졌다. 얼어붙은 임지유의 표정도 매정한 차현우의 눈빛도 그대로 박혔다. 아래에는 댓글이 끝없이 달렸다.
[평소에는 맨날 검정 슈트에 단정 이미지였는데... 속은 이렇게 대담했네.]
[몸매 뭐야. 허리 라인 미쳤다. 차 대표가 반한 이유 알겠다.]
[다리 길이랑 라인 실화냐. 비율 미쳤네.]
[가슴도 꽤 있어 보이는데... 대충 D쯤?]
[와... 말이 안 나온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말들이 줄줄이 이어질 즈음 임지유의 전화가 울렸고 받자마자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꽂혔다.
“임지유, 그 사진들 지워 줄 사람 없어. 방법은 하나야. 네 돈으로, 한 장씩 사서 내려.”
차현우는 잠시 멈추더니 말을 이어갔다.
“지아에게 한 죗값은 네가 치러. 지아를 맡긴 쪽 어른에게도 설명해야 하니까.”
뚝, 통화가 끊겼다.
임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계좌를 열었다. 잔액은 10억 남짓. 지난 5년 동안 차진 그룹에서 받은 월급을 모아 둔 돈이었다. 회사 지분도 배당도 모두 차현우가 쥐고 있었다.
이때 임지유는 갑자기 서랍 속 블랙카드가 떠올랐다. 상장 날, 차현우가 건네며 했던 말이 귓가에 선했다.
“한도 없어. 마음 편히 써. 앞으로 돈 걱정할 필요 없어.”
임지유는 지인에게 10억과 블랙카드를 맡기며 부탁했다.
“가능한 대로 다 사서 내려줘.”
하지만 업로더들이 부르는 값은 터무니없었다. 10억으로는 겨우 일곱 개 사이트를 내리는 데 그쳤다. 첫 결제는 승인됐지만 두 번째부터 블랙카드는 곧장 동결됐다.
“지유야, 카드가 막혔어. 이 사람들 요구가 수백억이래. 이 돈으로는 어림도 없어.”
임지유는 손에 남은 카드를 내려다보다가 눈앞이 흐려졌다. 이 카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회사에서 먹고 자며 연구했고 월급이면 충분했으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꺼내 든 오늘, 한 번 긁히고 곧바로 막혔다. 문득 지아가 떠올랐다.
지아는 차현우가 쥐여 준 가족카드를 들고 백화점을 휩쓸었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발이 아프다며 칭얼거렸고 그럴 때마다 차현우는 아예 명품 브랜드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매달 신상만 골라 오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돈은 물처럼 흘렀다. 지아는 그 물길 위에서 마음에 드는 것만 건지면 됐다.
휴대전화가 ‘띠링’ 하고 울렸다. 차현우 메시지였다.
[내 돈으로 사진 사지 마. 임지유, 네가 몸을 팔든 뭘 해서 벌든 난 한 푼도 안 보낼 테니까.]
임지유는 눈물을 훔치고 곧장 전화를 걸었다.
“그 특허... 팔아 줘. 사진이랑 영상부터 내려야 해.”
“정신 차려.”
친구가 다급하게 막았다.
“그건 네가 10년을 바쳐 만든 결과야. 안 돼.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게.”
친구는 예금까지 긁어모으고 아파트 세 채를 급매로 내놔 계약금부터 당겼다. 그 돈으로 원출처 계정들에 하나하나 연락해 돈을 주고 게시물을 내리게 했다. 여기저기 퍼간 것들은 신고와 지인 도움을 총동원해 밤새 정리했다.
모두 지워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친구가 예전에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유야, 그 연구 마무리만 하면 세상에 진짜 보탬 된다. 값으로 치면 수백억이 모자랄걸? 그때 나 한몫만 떼줘.]
친구의 농담이 아직도 귀에 맴돌았지만 임지유는 결국 차현우의 매정함만 떠올랐다.
‘차현우에게 10년을 쏟아부은 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대체 왜 그런 사람을 사랑했을까.’
별장 문을 여는 순간, 안에서 차세준의 울음이 터졌다. 임지유가 거실로 뛰어 들어가자 지아가 노골적으로 눈을 치켜뜨더니 차세준의 뺨을 탁하고 올려 쳤다.
“세준아!”
임지유는 지아의 손목을 잡아떼어내고 연달아 두 대를 올렸다. 이어 차세준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지아가 곧장 목청을 높였다.
“현우 삼촌!”
계단을 내려오던 차현우가 지아를 받아 안았다. 지아의 볼에 선명한 손자국을 보자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지아가 흐느끼며 매달렸다.
“이모 탓 아니에요. 이모가 오해하셨어요. 세준이가 블록 쌓고 있었는데 이모가 들어오자마자 화내시더니... 세준이가 오빠랑 너무 닮았다고 세준이 얼굴을... 제가 말리다 맞았어요.”
차세준이 눈물 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빠, 지아 누나가 저를 때렸어요. 엄마는 저 지키시느라... 저 때문에 그러신 거예요.”
차현우가 낮게 쏘아붙였다.
“임지유, 네가 정말 지아를 때렸어?”
임지유가 차세준의 볼을 살피며 또렷이 말했다.
“차현우, 세준의 얼굴 좀 봐. 내가 우리 아들한테 지금까지 손댄 적 있어?”
지아의 표정이 잠깐 굳더니 재빨리 자기 손목을 감쌌다. 하얀 거즈가 서서히 붉게 번졌다.
“아... 상처가 또 터졌나 봐요...”
차현우의 눈빛이 즉시 흔들렸다.
“괜찮아? 상처가 벌어졌어?”
지아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현우가 다시 임지유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 비서 뺨 열 대 때려. 지아가 당한 건 열 배로 갚아.”
변명할 틈도 없었다. 손바닥 소리가 좌우로 번갈아 터졌고 열 번째쯤 임지유 입가에 피가 번졌다. 임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차세준의 눈을 가렸고 차세준은 목이 터져라 울었다.
“아빠! 엄마 잘못 아니에요! 지아 언니가 저를 때렸어요. 엄마는 저 지켜주신 거예요... 아빠 미워요!”
차세준이 몸이 퍼덕이자 임지유는 더 꼭 끌어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열 대가 끝나자 차세준의 울음이 더 커졌다.
“엄마... 저희 이제 아빠 안 필요해요. 저는 엄마만 있으면 돼요.”
차현우의 표정이 굳고 말끝은 분노로 날을 세웠다.
“애를 이렇게 가르쳐? 다섯 살짜리가 아버지를 모르겠다고 하게 만들어? 못된 건 너야. 지아는 아무것도 몰라. 그런 일에는 좀 너그럽게 굴 수 없었어?”
임지유가 차세준을 안고 나가려 하자 차현우가 손짓했다.
“둘 다 마구간에 가둬. 정신 차리게 해.”
문이 닫히기 직전, 지아가 비웃는 얼굴로 입술만 움직였다.
“현우 오빠는 내 거야.”
그 순간, 임지유는 마음속으로 단정했다.
‘차현우, 넌 이제 내 남편이 아니야.’
밤의 마구간은 살을 에게 추웠다. 품에 안긴 차세준의 몸이 금세 달아올랐다. 고열이 오르자 임지유는 문을 열려 했지만 자물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임지유는 차현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은 건 지아였다.
“이모, 마구간은 좀 어떠세요? 이제 아시겠죠? 현우 오빠는 이모 말을 안 믿어요. 저만 믿고 저만 사랑해요. 세준이 데리고 멀리 떠나세요. 아니면 이모도 세준이도 편히 못 살게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