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오수아는 입가의 쓴웃음을 삼키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탁자 위 잔을 밀어내고, 바닥에 쌓여 있던 술 상자를 통째로 끌어올렸다.
“하 대표님, 잔 돌려가며 마시는 건 너무 번거롭네요. 병째로 마시는 게 더 빠르잖아요.”
청해시에서 오수아가 상류 사회의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꽃’으로 불린 이유는
단지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에겐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감각과 완벽히 계산된 담대함이 있었다.
남자는 성공하면 쉽게 자만에 빠진다. 그리고 그런 남자일수록 자신이 휘어잡지 못하는 여자에게 끌린다.
하 대표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역시 오수아 씨답네요. 오늘 이 상자 다 비우면, 이번 계약 바로 통과시킵시다.”
“좋아요.”
오수아는 잔말 없이 병을 땄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불 같은 술이 위장을 태웠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하나, 둘, 셋... 병은 순식간에 비워졌다.
몸이 휘청일 때, 심도윤이 얼른 그녀를 붙잡았다.
“누나, 괜찮아? 이제 그만 마셔.”
술기운이 머리를 쳤다.
오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내가 못 마시면, 대신 윤지유를 부를 거야?”
심도윤의 눈빛이 얕게 흔들렸다.
“누나, 무슨 소리야. 지유가 누나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겠어?”
그의 말에 오수아는 속으로 허무하게 웃었다.
그 말이 위로가 아니라, 그저 본능적인 자존심에서 나온 말이란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새벽이 깊어갔다.
모든 술병이 비워졌을 때, 하 대표가 두 손을 내리치며 웃었다.
“대단하네요, 오수아 씨! 졌어요. 이건 인정해야겠네요.”
오수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하 대표님, 경성시 성남구 그 부지, 심 대표님이 인수하는 걸로 하죠?”
하 대표가 눈을 찡그렸다.
“어떤 부지 말씀이시죠? 심 대표님은 오늘 시청 재건 프로젝트 이야기만 하셨는데요?”
그 말에 오수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땅이 아니었다.
심도윤이 그녀를 속인 것이다.
손끝의 힘이 풀리며, 빈 술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심도윤과 윤지유는 사라진 뒤였다.
오수아는 간신히 미소를 짓고 하 대표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술을 너무 마셨네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하 대표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다녀오세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하던 오수아는, 문을 여는 순간 낯선 숨소리를 들었다.
“도윤아, 분명 말했잖아... 오늘 오수아 대신 큰손들 만나게 해준다면서, 왜 하 대표님이랑 날 떼놨어?”
여자 목소리였다. 윤지유였다.
남자의 낮고 거친 웃음이 섞였다.
“바보야, 하 대표님은 손버릇이 안 좋아. 널 데려온 건 배우라고 한 거지, 넘겨주려고 한 게 아니야.”
윤지유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도윤아, 역시 날 제일 아껴주는 건 너야. 근데 오수아 언니가 오늘 네가 거짓말한 걸 알면, 나한테 화내지 않을까?”
심도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말했다.
“그 여자는 나한테 완전히 빠져 있잖아. 내가 부르면 모든 걸 잊고 달려오는 여자야.”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서른이야. 그런 인생 오래 못 가. 나 없으면 그냥 술 따르고 허튼 미소나 짓는 인생이겠지.”
윤지유의 숨결이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도윤아, 우리 결혼하자. 네 결혼식 날 다 정리하고 우리 바로 결혼식 올리자, 응?”
오수아는 더는 들을 수 없었다.
몸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루체 프라이빗 라운지를 빠져나왔다.
밖에는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몸을 때렸지만, 감각은 이미 무뎠다.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는 더 이상 속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도희미한 기대를 놓지 못한 건 어리석음이었다.
결국 그는 그녀를 이용해버렸다.
술기운, 비, 감정의 격랑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결국 오수아는 길 한복판에 쓰러졌다.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바삐 지나갔지만, 단 한 사람도 멈추지 않았다.
그때,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천천히 다가와 멈췄다.
뒤쪽 문이 열리고, 편안한 차림의 젊은 남자가 우산을 들고 내렸다.
그는 다가오는 운전기사에게 우산을 건네며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다.
비에 젖은 오수아를 안아 올리자, 기사는 얼른 우산을 펼쳐 그들을 감쌌다.
남자는 그녀를 차 안 뒷좌석에 눕히고, 소매로 얼굴의 빗물과 흙을 닦았다.
그리고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 어깨에 덮었다.
잠시, 시선이 그녀 얼굴 위에서 멈췄다.
표정에는 차갑고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낮게 말했다.
“병원으로 가요. 내 이름은 말하지 마요.”
“네, 박 대표님.”
운전기사가 급히 대답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박재원 회장이 직접 붙인 전속 기사였다.
박이현을 모신 지 2년, 그의 냉정함도, 잔혹함도 수없이 봐왔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청해시까지 직접 차를 몰고 와 비에 젖은 여자를 안아 올린 박이현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