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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다음 날, 배성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출장 가야 한다며 웨딩드레스 피팅에 함께 갈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윤이슬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집 안 구석구석에 있는 배성준과 관련된 모든 물건을 한 상자 가득 쓸어 담아 버렸다. 정리를 마치고 아직 숨도 돌리지 못했는데 윤희정이 사진들을 보내왔다. 사실 배성준은 출장이 아닌 윤희정과 함께 유행을 떠났다. 그녀의 다리를 치료해 주는 핑계로 말이다. 사진 속 두 사람은 폭죽이 터지는 밤거리에서 서로 껴안고 키스했다. 그리고 호텔 최고급 스위트룸에서 콘돔을 세 박스나 비웠다. 윤이슬이 저장하기도 전에 윤희정 쪽에서 취소했는지 사진은 모두 삭제되었다. 이후에도 윤희정은 끈질기게 사진을 보내오면서 시비를 걸었다. 윤이슬은 아예 그녀를 차단했다. 그러나 며칠 뒤, 윤이슬은 바에서 친구들과 가볍게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윤희정이 또다시 나타났다. “가끔은 언니가 참 딱하더라. 언니 엄마도 남자 하나 붙잡지 못했잖아. 그런데 언니도 나한테 남자를 뺏기네.” 윤희정의 말은 윤이슬의 절친 허지현의 심기를 단번에 건드렸다. 허지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DJ 부스 앞에서 마이크를 낚아채더니 윤희정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요즘 세상에 상간녀들이 이렇게까지 뻔뻔한가요? 윤씨 가문의 윤희정은 제 친구의 이복동생입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입원해 있는 틈을 타서 형부라는 사람이랑 바람을 피워 해외 여행을 갔더라고요. 떡도 어지간히 쳤겠죠.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년!” 허지현은 윤이슬과 친구로 지낸 지 10년이 넘었기에 그녀의 집안 사정도 훤히 알고 있었다. 윤희정은 당장이라도 허지현의 뺨을 때릴 기세였지만 주변 사람들이 우르르 휴대폰을 꺼내 촬영하자 그녀는 결국 뒷걸음질 치며 자리를 떴다. 욕 한번 시원하게 하고 나니 허지현은 한결 개운해졌는지 윤이슬과 한참 더 마셔댔다. 밤이 깊어 둘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허지현은 화장실에 간다고 했지만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감이 등골을 타고 올랐던 윤이슬은 급히 허지현을 찾아 나섰다. 화장실 문을 밀어젖힌 순간 그녀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남자 몇 명이 보였는데 바닥에는 술병이 산산조각 난 채 널브러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서 허지현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축 늘어진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옆에서는 윤희정이 코를 움켜쥐고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휴, 더러워 죽겠네. 됐어, 가자.” 돌아서다가 윤이슬과 눈이 마주친 순간, 윤희정은 오히려 능청스럽게 웃었다. “저년 머리통 터뜨리느라 술병을 23개나 깼어. 아쉬워서 어쩌지? 화장실에는 CCTV도 없거든. 그러니까 내가 얄미워도 뭐 어쩔 수 없을 거야.” 윤희정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윤이슬이 그녀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고 끌어냈다. “나한테 손대기만 해봐! 성준 오빠가 널 절대로 가만 안 둘 거야!” 겁에 질린 윤희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윤이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옥상 난간까지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미리 걸어둔 전화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배성준. 지금부터 5분 줄게. 구급차랑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신경외과 의사들은 다 데리고 와. 1초라도 늦으면 난 윤희정이랑 32층에서 같이 뛰어내릴 거야.” 윤이슬은 윤희정을 반쯤 허공으로 밀어냈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자 윤희정은 공포에 질려 목소리를 높였다. “성준 오빠! 나 살려줘!” 전화기 너머에서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듯 거친 숨소리만 몰아쉬는 배성준의 소리가 들려왔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더니 그는 이를 악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슬아, 많이 취했나 보네?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 ... 이틀 뒤, 응급 수술이 모두 마쳤다. 그리고 허지현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윤이슬은 중환자실에서 호흡기에 의존한 채 의식을 잃고 있는 가장 친한 친구를 핏발 선 눈으로 뚫어지게 응시했다. 허지현은 업계에서 손꼽히는 모델이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외모를 소중히 여겼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풍성했던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치료 때문에 삭발해야 했기 때문이다. 맥주병 조각이 눈을 관통해 시신경은 거의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예쁜 얼굴에는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긴 흉터가 남았다. 윤이슬이 열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보낸 시간은 고아보다도 비참했다. 계모가 개입하면서 그녀의 주변은 온통 모욕과 괴롭힘을 일삼는 나쁜 아이들, 상처투성이가 될 때까지 체벌을 가하는 악랄한 담임 교사,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의 옷을 벗기려 드는 에이즈 감염 강간범들로 가득했다. 그때, 가난했지만 마음씨가 착했던 허지현만이 항상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 윤희정이 새로 올린 SNS 게시물을 확인했을 때, 허지현은 세 번째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허지현의 부모님은 단숨에 늙어버린 얼굴로 주저앉았다. 정작 이 사건의 원흉인 윤희정은 찻집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SNS에 털이 밀리고 눈이 찔린 강아지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글을 덧붙였다. [입을 함부로 놀리면 이런 꼴이 되지.] 그 글을 본 순간, 윤이슬은 이성의 끈을 놓았다. 윤희정이 있는 찻집으로 찾아가 그녀의 뺨을 열 번이나 후려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뜨거운 주전자 속에 처박았다. 배성준이 소식을 듣고 도착했을 때, 윤희정의 얼굴 절반은 이미 벌겋게 되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그는 윤이슬의 가슴을 향해 발길질을 내리꽂았다. “윤이슬, 너 미쳤어?” 윤이슬은 갈비뼈가 부러질 듯한 충격에 피를 토했지만,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윤희정, 지현이가 죽게 되면 내가 널 가만 안 둘 거야. 너도 끝이라고.” 배성준은 고통에 울부짖는 윤희정을 애처롭게 살펴보다가 그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무슨 헛소리야? 희정이가 그러는데 그냥 네 친구랑 화장실에서 실랑이를 좀 벌이다가 실수로 넘어뜨렸다고 했어.” 그의 품에 안긴 윤희정은 양심에 찔리는 듯 눈빛을 피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윤이슬은 생명이 위독하다는 병원 측의 통지서를 배성준의 얼굴에 내던지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았어? 콘돔을 세 박스나 썼으니까 좋았겠지. 이미 더럽혀진 남자는 필요 없어. 우리 헤어져.” 그 말만 남기고 윤이슬은 자리를 떠났다. 더 이상 연기를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증거를 다 모으면 그녀는 직접 끝장을 내버릴 생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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