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최재율은 며칠 동안 본가에 머물며 정은희와 그의 아들을 돌봤다.
혼자서 넓은 집을 지키며 외로이 시간을 보내는 연민주는 옷방에 서서 손끝으로 비싼 드레스들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얼마 전까지 최재율은 연민주를 위해 시즌별 신상을 골라주었고 연민주가 입어 볼 때는 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으며 턱을 그녀 어깨에 올려놓고는 조용히 웃곤 했다.
“우리 민주는 뭘 입어도 다 예뻐.”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연민주는 이 옷들을 정리하여 박스에 넣은 뒤 ‘기부’ 라벨을 붙였다.
마치 곧 지워질 그녀의 인생처럼 말이다.
시스템이 연민주 머릿속에서 조용히 물었다.
[주인님, 15일 남았습니다. 정말 이대로 남은 15일을 보내실 건가요?.]
연민주는 미소를 지었다. 이 세계에서 완전히 최재율에게 의존해 살아간 탓에 지금 연민주 주머니에는 현금이 몇십만 원밖에 남지 않았다.
심지어 비싼 케이크 하나 사기에도 부족했다. 창백한 얼굴로 케이크 가게의 진열장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안녕하세요. 6인치 밤 케이크 하나 주세요.”
진열장 안에 금박으로 장식된 케이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생일 축하한다고 써 주세요.”
점원이 웃으며 물었다.
“초는 필요하세요?”
“네.”
잠시 멈칫한 뒤 한마디 했다.
“28개 주세요.”
이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위해 촛불을 붙이려 했다.
점원이 포장을 하고 있을 때 화려한 빨강 매니큐어를 한 손이 갑자기 카운터를 내리쳤다.
“이건 제가 살 거예요.”
정은희의 목소리는 달콤하다 못해 느끼할 정도였다.
“우리 아기, 오늘 딱 한 달 됐으니까요.”
정은희의 목소리를 들은 연민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있는 정은희는 배가 이미 평평해졌으며 목에는 최재율이 어제 경매에서 낙찰받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중요한 고객’을 위해 산 것이라고 주장했던 블루 다이아몬드였다.
“제가 먼저 왔어요.”
연민주는 아주 차분히 말했지만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빨간 입술이 연민주의 귀까지 닿을 듯 가까이 다가온 정은희는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연민주 씨, 재율 씨가 어젯밤 내 품에 기대 우리 아기를 재울 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요.”
연민주는 바로 깨달았다. 최재율 옷에서 발견했던 산부인과 검사 결과는 정은희가 일부러 넣은 것이었다. 연민주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누른 정은희는 아주 달콤한 어조로 말했다.
“재율 씨, 케이크 가게에서 누가 날 괴롭혀...”
전화기 너머의 최재율이 사랑 가득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누가 우리 아기 건드려!”
“눈치 없는 여자가.”
연민주를 바라본 정은희는 일부러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기 딱 한 달 돼서 케이크를 사려고 했는데 빼앗으려고 하는 거 있지?”
전화기 너머로 최재율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자 바꿔봐.”
정은희가 우쭐하는 표정으로 연민주의 귀에 핸드폰을 갖다 대자 최재율의 목소리가 독을 묻힌 칼날처럼 날카롭게 들려왔다.
“이봐! 지금 당장 그 케이크 놓고 꺼져. 우리 은희와 아들을 조금이라도 괴롭히면...”
잠시 멈칫한 최재율은 피비린내 나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가족 전체를 안성시 밖으로 쫓아낼 테니까.”
연민주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바닥에서 피까지 났다.
너무 어이가 없어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때 연민주를 위해 눈보라 속에서 사흘 밤낮 무릎을 꿇었던 남자는 지금 가장 잔인한 말로 그녀를 위협하고 있었다... 심지어 연민주의 목소리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은희가 케이크를 움켜쥐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들었죠? 재율 씨 말...”
찰싹!
갑작스럽게 뺨을 맞은 정은희는 몸을 비틀거렸다. 케이크가 탁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바람에 박스 안에 크림이 옆으로 퍼졌다.
“이 한 대는...”
연민주가 손을 닦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선착순이 뭔지 똑바로 알라는 뜻이야.”
연민주가 바닥에 떨어진 케이크 상자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핸드폰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최재율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다.
[민주야, 오늘 밤 야근할 것 같아. 그러니 기다리지 마.]
그리고 이내 또 한 통이 왔다.
[우유 따뜻하게 데워 마시는 거 잊지 말고, 이불 차지 말고.]
두 메시지를 본 연민주는 순간 열여덟 살 때 두 사람이 지하실에 움츠려 있던 때가 떠올랐다.
한밤중에 연민주가 위가 아프다고 하자 최재율은 늦은 새벽에 도시 전체를 뒤질 기세로 나가 약을 사 왔다. 돌아왔을 때 온몸에 눈이 잔뜩 쌓여 있었지만 약 상자를 가슴에 품고 있어 아주 따뜻했다.
그러고 어느덧 십 년이 지났다. 이제 보니 가장 고통스러운 배신은 잔인함마저 달콤하게 포장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시스템 경보음이 울렸다.
[경고! 주인님의 생체 신호 이상!]
코에서 나는 피를 닦아 낸 연민주는 케이크를 들고 저 멀리 걸어갔다.
뒤에 있는 정은희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울면서 통곡하고 있었다.
“재율 씨! 저 여자가 나 때렸어! 나 정말 놀랐어...”
공원까지 온 연민주는 벤치에 앉아 엉망이 된 밤 케이크를 열었다.
그리 밝지 않은 가로등이 몸을 비춰 바닥에 그림자가 생겼다.
차가운 밤바람에 옷깃을 여민 뒤 망가진 밤 케이크를 꺼내 조심스럽게 앞에 놓았다. 망가진 크림 위에 비뚤게 꽂힌 초는 마치 연민주의 불안정한 호흡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냥을 긋자 피어오른 불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더니 초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차가운 바람 때문에 푹 하고 꺼졌다.
두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가 되어서야 드디어 초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희미한 불빛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니, 마치 언제라도 사라질 듯한 영혼의 불꽃 같았다.
작은 빛을 응시하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몇 년 전 가장 가난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비가 새는 월세방에서 시작한 신혼생활은 너무 가난해서 라면 하나조차 나눠 먹어야 할 정도였다. 연민주 생일날, 최재율은 공사장에 몰래 나가 밤새 벽돌을 나르며 번 돈으로 연민주를 위해 손바닥만 한 작은 케이크를 사 왔다.
붙인 촛불도 바람에 여러 번 꺼져 최재율은 서툴게 손으로 촛불 주위를 감싸며 말했다.
“민주야, 소원 빌어, 빨리!”
무슨 소원을 빌까 고민한 연민주는 조용히 한마디 했다.
“최재율,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세요.”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아이러니하기 그지없었다.
연민주는 오늘 사 온 케이크를 한 입 한 입 먹었다. 크림은 이미 녹았고 밤 페이스트와 부서진 케이크가 뒤섞여 목구멍에 끈적하게 달라붙으니 마치 썩은 단꿀을 삼키는 것 같았다.
위병도 다시 발작한 듯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시작됨과 동시에 불타는 듯 익숙한 느낌이 복부에서 가슴으로 퍼졌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먹었다. 마지막 크림 한 입을 전부 삼킬 때까지...
“생일 축하해, 연민주.”
그러고는 자신에게 말했다.
낙엽이 밤바람에 휘날리며 발끝에 스쳤고 멀리서는 들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공원 건너편의 추모 공원이 보였다. 비석들이 달빛 아래 차갑고 흰빛을 내뿜고 있었다.
정말 적절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15일 후면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날 텐데 죽기 전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가 죽은 후에는 적어도 작은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추모 공원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닫으려던 늙은 묘지 관리인은 연민주가 창백한 얼굴로 철창 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가씨,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 무슨 일로 왔어?”
연민주가 조용히 말했다.
“구역 하나 사고 싶어서요. 얼마면 되죠?”
잠시 멈칫한 노인은 다시 물었다.
“누구를 위해서?”
연민주는 미소 지었다.
“가장 조용한 구석으로 주세요.”
그러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가급적이면... 영원히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곳으로.”
그러자 늙은 관리인이 중얼거리며 광고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가장 구석진 곳이 그나마 싸, 6백만 원이야. 살 거면 내일 와. 내가 여기서 기다릴게... 요즘 젊은이들 참 이상하네, 살아생전에 묘지를 고르다니...”
차가운 손으로 그 종이를 받아 쥔 연민주는 마침내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