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연민주는 머릿속으로 전에 자기 돈으로 샀던 물건들을 팔면 얼마를 마련할 수 있을지 계산하고 있었다. 죽은 후 최재율과 다시는 그 어떤 걸로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최재율이 번 돈 한 푼도 쓰고 싶지 않았다.
밤바람에 연민주의 얇은 트렌치코트가 휘날렸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연민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뒤에서 연민주의 목을 움켜쥔 거친 큰손은 점점 더 심하게 그녀의 목을 조였다. 그러더니 다른 손에 쥐어져 있는 자극적인 에테르 냄새가 밴 손수건으로 그녀의 코와 입을 꽉 틀어막았다.
연민주는 손톱이 상대방 팔뚝의 살점을 뜯어낼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상대방은 그저 냉소를 지을 뿐 아무 반응 없이 물건을 다루듯 연민주를 자루에 거칠게 쑤셔 넣었다.
“으응...!”
머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강하게 부딪혀 눈앞이 번쩍거렸다. 자루의 거친 안쪽이 연민주의 얼굴을 문질렀고 먼지가 폐로 들어가 숨이 막혔다.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지만 이내 몸 전체가 땅바닥에 내던져졌다.
“최 대표님 말씀하셨어. 죽을 때까지 때리라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낮은 소리로 악마처럼 웃었다.
자루가 거칠게 벗겨지며 눈부신 형광등 빛이 동공을 강타했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은 연민주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릿한 시야 속, 날씬한 실루엣이 빛을 내뿜는 배경 속에 서 있었다. 구두가 콘크리트 바닥을 밟는 소리는 마치 저승사자의 카운트다운 같았다.
최재율이었다.
손에는 전기 충격기가 들려 있었고 금속 끝부분은 차가운 빛을 반사하여 마치 독사의 송곳니 같았다.
“감히 내 사람을 건드려!”
최재율의 목소리는 얼음보다 차가웠다.
“대담하구나.”
연민주는 입을 벌려 최재율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목이 에테르에 중독된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저 쉰 소리만 내뱉었다.
최재율은 저 멀리 있는 사람이 연민주인 것을 몰랐다.
오늘 최재율이 본 적 없는 낡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연민주는 머리도 대충 말아 올려 묶었다. 얼굴에는 조금 전 추모 공원의 먼지까지 묻어 있어 평소의 정교하고 우아한 최씨 가문 사모님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게다가 자루 속에 갇히면서 얼굴에 공포가 가득했기에 최재율은 연민주를 알아보지 못했다. 눈앞의 초라한 여자가 한때 자기가 그토록 아끼던 아내라는 것을...
전기 충격기가 연민주의 복부에 닿은 순간 연민주는 고통으로 온몸의 경련을 일으켰다. 서른두 번째 전기 충격 자살의 공포가 다시 온몸을 휩쓸었다.
이것은 시스템이 시뮬레이션한 전기 충격으로 인한 자살보다 열 배는 더 고통스러웠다.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고 뼈는 마치 으스러지는 듯했다. 그렇게 물에서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콘크리트 바닥에서 격렬하게 온몸을 떨었다. 하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심장이었다...
최재율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냉담한 눈, 분노로 인해 긴장된 턱선, 다른 여자를 위해 연민주를 무차별하게 폭행하는 모습...
“계속해.”
최재율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두 번, 세 번...
전기 충격이 한 번씩 가해질 때마다 연민주는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한때 본인이 굶을지언정 빵을 길고양이에게 주던 최재율이 이렇게 변해버렸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정은희 대신 복수하기 위해 자기 권력으로 ‘낯선 사람’을 죽도록 때릴 줄이야...
폭우가 쏟아지던 날 연민주가 최재율을 처음 만났을 때 최재율은 골목길 입구에 쪼그려 앉아 마지막 빵 반 조각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꾀죄죄한 길고양이에게 주고 나머지 한쪽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악...!”
전류가 오장육부를 관통하는 순간 연민주는 눈빛이 축 늘어졌다.
하지만 몸속 다리 사이에서 따뜻한 액체가 천천히 흘러나오는 것은 똑똑히 느꼈다.
연민주는 바로 깨달았다... 배 속에서 한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최재율 몰래 이식한 배아였다.
석 달 전 건강검진을 핑계로 최재율을 달래 정자를 채취했다. 의사는 당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궁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성공률이 5%도 안 됩니다.”
하지만 연민주는 자기 결심을 고집하며 매일 병원에 와서 주사를 맞았다. 주삿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고통이 극에 달했지만 최재율이 ‘아이는 원하지 않아’라고 말할 때의 마음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민주야, 네 건강이 더 중요해.”
최재율은 항상 이렇게 연민주를 달랬다.
나중에 검사를 받으러 갔을 때 의사들이 모두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연민주는 결국 체념했다. 하지만 아이가 살아남았을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안 돼! 이대로 잃을 수 없어!’
연민주는 절망 가득한 눈빛으로 전기 충격기를 든 최재율이 그녀의 복부를 더 세게 누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최재율은 전기 충격기로 기적처럼 살아남은 작은 생명을 죽이고 있었다.
전류가 온몸을 다시 한번 관통했을 때 열일곱 살의 최재율이 빗속에 쪼그려 앉아 마지막 빵을 길고양이에게 주는 모습이 눈앞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무서워하지 마, 나도 같이 굶을게.”
다시 깨어났을 때 연민주는 어느새 익숙한 침실에 누워 있었다.
눈부시게 밝은 창밖의 햇빛, 깨끗한 침구 세트는 마치 어젯밤의 폭행이 그저 악몽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복부의 심한 통증과 다리 사이로 말라붙은 피는 어제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깨우쳐 줬다
[띵!]
시스템의 목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주인님의 신체에 치명적인 손상 발생, 감정 변동 지수 임계점 돌파. 전송 붕괴 방지를 위해 시스템이 특례로 긴급 구조 프로그램을 가동합니다.]
고통스럽게 몸을 일으킨 연민주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이야?”
[카운트다운. 10일.]
시스템의 기계음은 여전히 차가웠다.
[주인님은 그동안 건강관리를 잘하여 영혼이 잘 분리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잠시 멈칫한 연민주는 이내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우습기 짝이 없었다.
시스템이 최재율보다 연민주의 생사에 더 관심을 기울이다니.
손끝으로 평평한 복부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한때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던 배 안에는 공허함만 남았다. 추모 공원 자리를 예약한 뒤 유골함 두 개를 준비했다. 자기 유골함 옆에 작은 유골함을 놓은 뒤 간단하게 몇 글자 적었다.
[우리 딸 수아, 다른 세상에서 재회하기를 바라.]
그러고는 화장터에 갔다.
“시체 수령은... 10일 후로 해주세요.”
연민주는 마치 날씨 얘기를 하는 것처럼 아주 평온하면서도 차분히 말했다.
직원이 고개를 들어 연민주를 바라보았다.
“고객님... 지금 전액을 지불하실 건가요?”
“네.”
그러고는 현금 한 묶음을 건넸다. 그것은 연민주가 모든 장신구와 개인 물품을 팔아 마련한 돈이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바로 화장해 주세요.”
화장터를 나설 때 눈부신 햇빛에 눈이 아팠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9일, 간단하게 유서를 작성했다.
돈을 어떻게 할지 명시했다.
[모두 유기 동물 보호소에 기부할 것. 모든 소셜 계정은 영구 삭제했으며 일기장도 태워버릴 것.]
심지어 묘비명까지 써놓았다.
[여기에 추위를 극도로 무서워하는 사람이 잠들어 있으니 비를 맞지 않게 해 주세요.]
최재율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최재율이라는 사람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래전부터 이미 준비해 둔 수면제 알약을 한 알 한 알 손바닥에 올린 뒤 단지 잠이 들려는 것처럼 침대에 누웠다.
이렇게 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시체를 수습하는 사람을 일부러 놀래키고 싶지 않았고 또 그 누구도 자기 때문에 악몽을 꾸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항상 다른 사람을 생각해 주며 살았던 이번 생처럼 죽기 전까지도 다른 사람을 배려했다.
약효는 매우 빨리 나타났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할 때 핸드폰이 갑자기 자동으로 음성을 재생했다.
“민주야, 나 몰디브 출장 갈 거야.”
최재율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여전히 부드러웠다.
“냉장고에 7일 치 약선 식사 준비해 뒀으니 꼭 데워서 먹어.”
초기의 무감각함이 지나가자 격렬한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신경 시스템이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셀 수 없는 바늘들이 모든 근육을 찌르는 것 같았다.
손가락에서 경련이 일어나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고 손가락 마디는 어느새 하얗게 변했다. 폐는 시멘트를 쏟아부은 듯 점점 굳어져 호흡할 때마다 칼날 위를 구르듯 아픔이 끝없이 밀려왔다.
시스템이 시뮬레이션한 고통보다 백 배는 더했다.
고통을 참고 눈을 뜬 연민주는 휴대폰 화면이 밝아진 것을 보았다.
휴대폰 화면에는 낯선 번호가 떠 있었다.
바로 그때 정은희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이 화면에 튀어나왔고 그 아래에는 글귀도 적혀 있었다.
[재율 씨가 결혼식을 올려주겠대요.].
모든 게 우스웠다.
최재율과 연민주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때 최재율이 말했다.
“민주야, 회사가 상장하면 너에게 가장 성대한 결혼식을 해줄게.”
하지만 나중에 그 말이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결혼식 하면 너무 힘들어. 네 건강이 걱정돼.”
그리고 지금... 결혼식은 결국 다른 사람과 하게 되었다.
더 이상 ‘생명 지수 0’ 재가동 같은 것도 없었고 카운트다운하는 기계음도 없었다. 되돌릴 수 없는 영원한 소멸만이 남았다.
호흡이 점점 느려질 때 시스템이 마침내 울려 퍼졌다.
[전송 프로그램 가동.]
[3초 후 이번 세계에서 이탈.]
[3...]
연민주는 열아홉 살의 최재율이 빗속에서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았다.
[2...]
최재율이 눈 속에 꿇어앉아 ‘민주야, 네가 죽으면 나도 같이 죽을 거야’라고 말하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1...]
그러고 최재율에게 조용히 말했다.
“최재율, 이번에는 내가 먼저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