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비행기에서 메시지를 보낸 최재율은 벌써 17번째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사흘 전에 보낸 마지막 메시지에 멈춰 있었다.
[자기야, 냉장고에 7일 치 약선 식사 준비해 뒀으니 꼭 데워서 먹어.]
최재율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연민주에게 전화를 걸려 할 때 정은희가 핸드폰을 빼앗았다.
“재율 씨.”
정은희가 붉은 입술이 삐죽했다.
“허니문 동안만은 나에게 집중하기로 했잖아.”
그러고는 핸드폰을 그녀 가방에 쑤셔 넣으며 손가락으로 최재율의 가슴에 원을 그리듯 쓰다듬었다.
“민주 언니도 어린애가 아니잖아. 설마 굶어 죽겠어?”
최재율이 정은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런 말 하지 마.”
그러자 정은희는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혔다.
“미안해... 나 그냥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래.”
얼굴을 최재율의 목에 파묻으며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날 볼 때마다 민주 언니 생각하는 거야?”
최재율은 본능적으로 부정하려 했지만 부두를 바라본 순간 머릿속에 예전 기억이 떠올라 말을 하지 못했다. 5년 전, 연민주가 부두에 쪼그려 앉아 길잃은 개에게 멀미약을 조심스럽게 먹이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 연민주는 고개를 들어 최재율에게 웃으며 말했다.
“재율아, 이 녀석도 너처럼 배 타는 거 무서워하나 봐.”
옆에 있는 정은희의 몰래 이를 악물며 분노를 삼켰지만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최재율을 이끌고 웨딩드레스 피팅하러 갔다.
“예뻐?”
드레스를 입은 정은희가 한 바퀴 돌자 눈부신 레이스가 눈앞에서 휘날렸다.
정은희를 응시하며 넋을 잃은 것 같은 최재율은 눈앞에 정은희가 아니라 3년 전 연민주가 잠옷을 입고 부엌에서 해장국을 끓이는 모습이 펼쳐진 것 같았다.
그때 연민주가 뒤돌아서 웃으며 최재율에게 물었다.
“최 대표님, 아내 솜씨 한번 맛볼래요?”
최재율은 연민주의 어깨를 감싸 안은 뒤 그녀가 숨이 찰 때까지 키스를 했다...
“재율 씨?”
발을 구르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최재율을 부르는 정은희의 목소리에 최재율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아주 예뻐.”
하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연민주의 생각뿐이었다.
최재율의 모습을 본 연민주는 갑자기 무심코 말을 꺼냈다.
“민주 언니는 웨딩드레스를 입으려 하지 않았잖아, 혹시...”
정은희는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돈 뒤 한마디 했다.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닐까?”
“그 입 다물어!”
최재율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뜨거운 액체가 맞춤 정장에 튀었지만 고통따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점원은 겁에 질려 소리도 내지 못했고 정은희는 울면서 달려와 최재율의 손을 닦아 주려 했다. 하지만 최재율은 정은희를 바로 밀쳐 냈다.
“재율 씨, 미안해. 나, 나는 그냥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다시는 이런 말 안 할게... 제발...”
최재율의 손을 잡은 정은희는 눈물범벅이 된 채 말했다.
최재율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지만 연민주에게 보낸 메시지는 여전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그래서 천천히 앨범 사진을 열었다.
가장 최근 사진은 반년 전에 찍은 것이었다. 연민주가 소파에 웅크려 책을 읽고 있었다. 햇살이 얇은 커튼 사이로 비쳐 연민주의 속눈썹 아래로 황금빛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연민주는 절대 노출이 많은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그러면서 항상 말했다.
“재율아, 내 다리에 흉터가 있어서 드레스 입으면 안 예뻐.”
왜냐하면 아홉 번째 자살을 시도했을 때 철근이 다리에 관통하여 흉터가 남았기 때문이다.
“정은희, 너와 몰디브에서 결혼사진을 찍겠다고 한 건 지난 몇 년 동안 네가 내 곁에 있으면서 아이를 낳아줬기 때문이야. 너 자신을 너무 높이 보지 마, 민주를 뛰어넘으려고도 하지 마. 알겠어?”
정은희는 눈에 원한의 빛이 스쳤지만 여전히 고분고분한 표정을 지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재율 씨, 당신 곁에 남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다른 건 더 바라지 않아...”
짜증 가득한 얼굴로 밖으로 나간 최재율은 핸드폰을 들어 연민주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로는 차가운 통화연결음만 들려왔다.
[전화기가 꺼져있으니 소리팸으로 연결됩니다...]
최재율은 밤새도록 연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려 125통이나 걸었지만 여전히 꺼져 있는 핸드폰은 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에 집중하다가 지쳐 잠든 후 꿈에서 연민주를 만났다.
꿈속에서 그들이 처음 데이트했던 작은 식당에 서 있는 연민주는 빨아서 색이 바랜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민주야...”
연민주를 안으려 했지만 팔은 허공에만 맴돌았다.
“최재율.”
웃으며 뒤로 물러난 연민주는 모습이 점점 투명해졌다.
“오로라 보여주기로 했잖아.”
깨어났을 때 베개는 이미 젖어 있었다.
옆에 깊이 잠들어 있는 정은희는 원래 연민주에게 주기로 했던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왠지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어 즉시 비서에게 연락해 가장 빠른 귀국행 티켓을 구매하라고 했다.
“재율 씨! 나에게 결혼식을 해주기로 약속했잖아!”
정은희가 최재율의 손을 꽉 잡으며 떠나는 것을 막았다.
‘분명 몰디브까지 왔는데 왜 아직도 연민주 그년을 생각하는 거야!’
정은희는 어떻게든 이 결혼식을 마쳐야 했다. 연민주가 자신을 비웃게 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우리 쪽에 폭우가 내리고 있어 모든 항공편이 결항되었습니다. 사모님 쪽은 걱정 마세요. 가정부에게 물어봤는데 사모님이 요즘 드라마 보느라 밤새워 좀 피곤하다면서 일찍 잠들었다고 했습니다...”
비서의 목소리와 정은희의 울음소리가 뒤섞이자 최재율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제 최재율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지난번 밤을 새웠던 날은 연민주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던 밤이었다.
그때 흥분하여 어린애처럼 콩콩 뛰며 발코니에서 밤새 담배를 피웠다. 마치 눈을 감으면 아름다운 이 꿈이 깨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 최재율은 결혼식 장소에 서 있었다. 정장을 빼입었지만 가슴은 마치 거대한 돌이 누르고 있은 듯 숨쉬기조차 어려웠고 목구멍에서는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지자 정은희가 그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입장했다.
값비싼 맞춤형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정은희는 치맛자락에 수많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어 햇빛 아래에서 유난히 반짝였지만 최재율은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민주가 입었다면 정말 예뻤을 텐데.’
바로 그때 사회자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재율 씨, 정은희 씨와 결혼하여 가난하든 부유하든...”
침을 꿀꺽 삼킨 최재율은 귓가에 연민주가 보냈던 마지막 음성이 울려 퍼졌다.
“재율아, 약선은 냉장고 두 번째 칸에 있어.”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눈치채기 어려운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그때 최재율은 회의 중이어서 그냥 ‘응’이라고만 답했다.
이것이 연민주가 최재율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목소리가 목구멍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정은희는 불같이 뜨거운 시선으로 최재율을 바라봤다.
샴페인과 장미의 달콤한 향이 잔뜩 퍼진 조용한 분위기 속 하객들은 최재율의 대답을 조용히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