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채은아...”
이수진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그건 다 포기할 수 있어! 하지만 현우 오빠는 절대 건드려선 안 돼!”
샤넬 앰버서더 따위 천개라도 서현우와 비교가 안 되었다.
“서 대표는 네 사람이야. 아무도 못 빼앗아.”
이수진이 위로하며 말했다.
“어젯밤에 아무리 같이 있었다고 해도... 남자는 원래 다 그래. 서 대표처럼 잘난 사람 곁에 여자가 있는 건 어쩔 수 없지. 어떤 여자 연예인이 그 사람 침대로 가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저 여자에겐 왠지 모르게 위기감이 느껴져.”
“널 도발하는 거야. 네가 발끈할수록 저 여자 뜻대로 되는 거니까 우린 당당하게 절대 휘둘리면 안 돼.”
이수진이 거듭 위로하자 그제야 임채은은 조금 진정되었다.
“서 대표한테 전화해 봐. 네가 애교 부리면서 잘 구슬리면 여자 하나 정도는 쉽게 처리하잖아.”
임채은이 휴대폰을 꺼내 서현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몇 초 만에 끊겼다.
...
오션 그룹 회의실.
서현우는 임채은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회의를 마친 다음 휴대폰을 든 채 회의실을 나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곧 연결되었다.
“현우 오빠...”
임채은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나를 괴롭혀...”
“뭐?”
서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너를 괴롭혔어?”
“윤소율!”
그녀는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앞에 와서 어젯밤 내내 오빠랑 있었다고 자랑했어. 오빠 말고도 내 작품, 광고까지 전부 빼앗아 가겠대...”
서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윤소율의 화려하고 당당한 얼굴을 떠올렸다.
정말 마녀나 다름없었다.
“현우 오빠...”
임채은은 남자가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자 말을 덧붙였다.
“듣고 있어?”
“억울하면... 연예계를 떠나.”
“...”
임채은은 단연코 이런 대답이 나올 줄 몰랐다.
“연예계처럼 더러운 곳은 너에게 맞지 않아.”
서현우가 말을 멈췄다.
“나는 연예계를 싫어해.”
임채은은 돌연 침묵했다.
연예계에서 데뷔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서경수는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서씨 가문은 3대째 이어지는 재벌가로 서경수 세대부터 줄곧 나라의 인재를 배출했고 연예계 하류를 가장 경멸했다.
그리하여 임채은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김영숙이 아무리 임채은을 마음에 들어 해도 서경수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임채은이 연예계에 몸담은 것도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길거리 캐스팅이 되어 작품을 찍으며 아역 배우로 데뷔했지만 이를 주업으로 삼지 않았다.
금융 위기가 닥쳐서 임상 그룹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자금이 끊기자 임채은은 다시 연예계로 돌아왔다.
최고급 여배우의 연간 수입은 상장사 몇 개의 시가총액을 능가했다.
“현우 오빠, 약속했잖아. 약혼하면 연예인 그만두기로.”
임채은이 떠보듯 물었다.
“잊었어?”
전화 너머로 서현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이가 널 싫어해.”
“...”
“오랫동안 제대로 관심을 가지지도 않으니까 애가 다가가지 않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이에게 관심을 가져? 나도 이안이 안고 세상에 알리고 싶어. 내가 이안이 엄마고 이안이가 내 아들이라고. 하지만 내게 무슨 명분이 있어? 우린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바깥사람들 눈에 난 미혼인 재벌가 딸인데. 게다가... 난 이안이 지켜주려고 다가가지 않는 거야. 현우 오빠, 나랑 결혼하기로... 약속했잖아. 나랑 결혼하기 싫어?”
“회의 있어. 끝나고 다시 연락할게.”
서현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임채은은 휴대폰을 움켜쥔 채 얼굴이 굳어졌다.
문득 서현우가 손에 잡은 모래처럼 걷잡을 수 없이 훅 떠나버릴 것 같았다.
머릿속 남은 한 가닥의 끈이 툭 끊기며 임채은이 서러운 듯 울기 시작했다.
이수진은 당황하며 위로했다.
“채은아, 무슨 일이야?”
“오빠는 내가 이안이랑 보내는 시간이 너무 적대. 내가 뭘 어떡해?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어떻게 당당하게 이안이 곁에 있어!”
명예를 가장 중요시하는 임씨 가문에서 만약 혼전 임신 소식이 알려지면... 윤소율은 자신의 직업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웠다.
“5년이나 기다렸어, 5년이나! 나한테 프러포즈도 안 했는데 그렇다고 내가 해?”
진수희는 늘 그녀에게 자제하라고만 했다.
그 가식을 떠느라 임채은은 서현우에게 몸을 던지지도 못했다.
소중한 ‘처음’은 두 사람의 신혼 첫날밤을 위해 남겨두고 싶었다.
“요즘은 예전과 달라. 임씨 가문의 가풍이 엄격하지만... 이렇게 방탕한 세상에 서 대표가 윤소율 같은 불여우에게 넘어갈까 봐서 걱정이네.”
“무슨 뜻이야?”
“채은아, 너와 서 대표 사이엔 이안이가 있잖아. 자식 덕을 보는 건 당연하지만 네가 그 사람 마음을 사로잡지 못할까 봐서 걱정이야. 어느 날 결혼해도 마음이 네게 향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임채은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난 어떡해?”
이수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여자는 때론 수작을 부리지 않으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해.”
임채은은 즉시 이해하고 눈동자를 번뜩였다.
...
저녁에 마이바흐가 연우 빌딩 앞에 멈췄다.
주도윤이 차 문을 열자 임채은이 차 쪽으로 걸어갔다. 서현우는 뒷좌석에 앉아 PDA를 들고 있었다. 화면에는 복잡한 데이터가 가득 해 한눈에 봐도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남자는 집중해서 보며 이따금 엔터 키를 눌렀다.
임채은이 뒷좌석에 앉으며 말했다.
“현우 오빠, 아직도 바빠?”
서현우는 가볍게 PDA를 닫으며 말했다.
“회사 재무 보고서인데 한번 살펴보는 거야.”
차 문이 닫히고 임채은은 의도적으로 그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서현우는 그 작은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고 운전사에게 지시했다.
“임씨 가문 저택으로 가.”
“잠깐만!”
임채은이 급히 말을 끊자 서현우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임채은을 바라보았다.
임채은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왜 그래?”
“현우 오빠, 나...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 그동안 너무 바빠서 나랑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했잖아.”
임채은이 남자의 팔짱을 끼며 머리를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었다.
“최근에 요리를 배우고 있는데 내가 한 요리 먹어보지 않을래?”
“왜 갑자기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어?”
“앞으로 결혼하면 난 연예인 그만두고 오빠가 퇴근하길 기다렸다가 요리해 줄 거야. 싫어?”
“그건 할 사람이 있잖아.”
임채은이 다소 서러운 듯 말했다.
“내가 한 요리는 안 먹어볼 거야?”
서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더 말하지 않고 기사에게 지시했다.
“출발해.”
“대표님, 명진으로 갈까요?”
서씨 가문의 저택은 오션 그룹에서 도시 전체를 가로질러야 도착할 거리에 있었다.
따라서 서현우는 오션 그룹 건물 근처 시중심에 별장 한 채를 샀고 그게 명진 별장이었다.
번화한 중심 지역에서 드물게 조용한 곳이었다.
차량이 지하 주차장에 멈추자마자 서현우는 윤소율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소피 클럽.]
[와요.]
[30분 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