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5년 후 공항.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성이 퍼스트 클래스 휴게실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온몸을 꽁꽁 가린 채 큰 모자와 얼굴의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썼지만 하얗고 티 없는 피부와 그린 듯한 눈썹은 감출 수 없었다.
매니저가 무거운 LV 캐리어를 끌고 휴게실로 들어오자 윤소율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어떻게 된 거야?”
“가방이 너무 무거운데 혹시 우리와 같은 가방을 가진 사람이 잘못 가져간 건 아닐까요?”
그녀는 가방을 윤소율의 발치에 내려놓았고 윤소율은 갑자기 가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매니저도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가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요?”
쭈그리고 앉아 가방에 귀를 대던 윤소율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말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아이의 소리였다.
그녀는 즉시 가방을 눕혔지만 가방은 비밀번호로 잠겨 있었다.
매니저는 놀라 소리쳤다.
“설마 인신매매인가요?”
가방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며 안에서 아이가 몸부림치는 듯했다.
누가 이렇게 잔인하게 아이를 가방에 가뒀을까.
매니저는 당황스러웠다.
“어쩌죠? 경찰에 신고할까요? 이러다간 아이가 산소 부족으로...”
윤소율은 의외로 차분히 귀걸이를 빼서 잠금장치에 넣고 귀를 대더니 잠금장치의 소리를 들으며 조작했다.
너무 집중한 탓에 선글라스가 바닥에 떨어졌다.
잠시 후.
달칵, 소리와 함께 비밀번호 잠금장치가 바로 열렸다.
윤소율이 가방을 열자 검은 정장을 입은 어린 소년이 상자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약 4, 5세 정도로 보였고 품에는 귀여운 곰 인형을 꼭 껴안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상자에 갇혀 있었는지 작은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땀으로 젖어 있었으며 검은 머리가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윤소율이 아이를 안아 들기도 전에 아이는 고개를 들며 순수하고 예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한 점의 잡티도 없는 순수함으로 빛났고 속눈썹은 풍성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하얀 얼굴은 눈처럼 깨끗하고 귀여웠으며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이 여려 보였다.
애티가 남아있는 정교한 얼굴에 붉은 입술과 하얀 이가 마치 작은 요정처럼 보였다.
아이가 갑자기 서러운 표정으로 윤소율의 품에 안겼다.
“엄마!”
꼬마가 작은 얼굴을 윤소율의 가슴에 비비적거리며 어깨를 살짝 떠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매니저는 당황하며 말했다.
“함부로 엄마라고 부르면 안 돼. 기자들이 들으면 혼전임신이라고 기사 쓸 거야...”
윤소율은 유명한 스타였다.
“아이가 놀라서 그러는 거야. 경찰에 신고해.”
품에 안긴 소년이 여전히 떨고 있자 윤소율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가, 네가 사람을 잘못 봤어. 아줌마한테 말해봐. 이름이 뭐야?”
아이는 고개를 들어 윤소율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두 눈에 초점이 사라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윤소율은 아이가 지나치게 경계하는 줄 알고 이렇게 말했다.
“아줌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이름 알려주면 아줌마가 부모님 찾아줄게, 알았지?”
소년은 천천히 말했다.
“서... 이안이요.”
‘서이안?’
윤소율의 입꼬리가 경직되었다.
현국, 특히 경진에서 서씨 성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었고 게다가 재벌 가문이었다.
윤소율은 소년의 소매에 수 놓인 서씨 가문의 로고를 바라보며 시선을 서서히 소년의 얼굴로 옮겼다. 눈매나 태도, 분위기 모두 그 남자와 닮아 있었다.
백옥 같은 손가락 끝이 서이안의 얼굴을 가볍게 스쳤다.
윤소율은 아이의 얼굴을 통해 남자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신의 축복을 받은 잘생긴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서현우와 임채은의 아이다.
그해 남자는 임채은을 위해 그녀 배 속에 있는 귀여운 쌍둥이를 핏덩이로 만들었다.
‘아이가 대충 4, 5살로 보이는데 그럼 결혼한 지 2년 만에 서현우와 임채은이 진작 아이를 만든 건가.’
만약 그때 배 속의 두 아이를 지켰다면 그들도 지금 이 나이쯤 되었을 테고 이렇게 귀여웠을 거다.
서현우...
5년 만이다.
그해 현국에 있는 모두가 서씨 가문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며느리 윤서린을 맞이했고 그 여자가 5년 전 납치 사건으로 불에 타 죽었다는 걸 알고 있다.
당시 그녀 본인도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고 너무 심하게 다쳐서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심한 출혈로 인해 몸속에 있는 피를 전부 갈아치웠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얼굴의 반점이 서서히 사라졌다.
기남준이 모든 일을 처리하고 그녀의 존재를 숨겨 전 현국에는 그녀가 불길에 휩싸여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12년간 지독하게도 서현우를 사랑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가득 채웠던 12년이 이젠 한낱 우스꽝스러운 짝사랑이 되어버렸다.
남자는 윤서린을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녀를 죽을 때까지 이용했다.
윤서린은 죽었지만 그녀는 ‘윤소율'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기남준과 함께 해외로 가서 ‘윤소율'이라는 이름으로 할리우드에 데뷔했다.
단 하루 만에 [뷰티풀 우먼]으로 데뷔와 동시에 정점을 찍으며 할리우드의 아름다운 마녀로 불렸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흘러 잃어버린 걸 되찾을 때가 왔다.
뼛속 깊이 증오하는 남자가 그녀에게 미친 듯이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할 생각이다. 자신의 치마폭에 굴복하고 사랑에 빠져 구제 불능이 되었다가 결국 처참하게 버려지기를. 그다음 두 손으로 직접 오션 그룹을 무너뜨릴 것이다.
서현우...
윤소율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붉은 입술을 가볍게 비틀었다.
“내가 돌아왔어.”
...
서씨 가문 저택.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무거운 기운이 내려앉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압박했다.
롤스로이스 팬텀이 급정지하며 비서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었다.
“대표님!”
문이 열렸지만 뒷좌석의 남자는 여전히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휴대폰에서 채은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우 오빠, 알아냈어. 가정부가 2억을 빚졌는데 누가 4억을 주겠다며 매수해서 이안이를 다크웹에 팔라고 했대. 캐리어에 레이저 차단기를 넣고 이안이를 숨겨서 해외로 보내려고 했던 거야...”
그런데 똑같은 캐리어가 있었고 서두르던 중 가정부가 잘못 가져갈 줄이야.
“내가 처리할게.”
임채은이 안도하며 말했다.
“이안이는 괜찮아? 저녁 촬영 미뤘으니까 일찍 갈 수 있어.”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넌 이안이랑 보내는 시간이 너무 적어.”
“현우 오빠...”
남자는 무표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비서 주도윤은 남자의 어두운 눈매를 보고 우산을 든 채 차 문 옆에 서서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서현우는 화가 났다.
그의 아들이 해외로 납치될 뻔했다.
‘감히 내 아들을 건드리다니, 망할 놈들.’
차 문 아래로 길고 늘씬한 다리가 나오자 주도윤은 서둘러 우산을 남자의 머리 위로 옮겼다.
서현우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채 당당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의 턱선은 베일 듯이 날카롭고 눈썹은 붓으로 그린 듯 선명했으며 단정하게 빗어 올린 검은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지만 잘생긴 외모를 감추지는 못했다.
남자가 성큼성큼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자 도우미가 공손히 맞이했다.
“대표님!”
서현우의 잘생긴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가득했고 그 외 다른 감정은 전혀 없었다. “아이는요?”
“작은 도련님은 무사해요. 위층에서 다른 분과 함께 있어요.”
서현우가 위층으로 올라가서 서재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문 너머로 흐르는 시냇물 같은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찰나의 영원].
이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곡이었다.
‘윤서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