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남자의 차가운 눈동자가 순간 멈칫하며 문을 살며시 열었다.
서재 안에는 한 여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그를 등진 채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흑백 건반을 연주하고 있었다.
서이안은 피아노 위에 엎드려 말랑한 뺨을 괸 채 동그란 눈매가 웃는 듯 휘어져 있었다.
서이안이 웃고 있다.
어릴 적부터 아이는 웃는 일이 드물었다.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 없었던 탓인지 어렸을 때부터 약간의 자폐증 증상을 보이며 사람을 만나는 것도, 대화를 나누는 것도 싫어했고 잘 웃지 않았다.
아이가 웃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던 서현우는 순간 놀라서 문을 활짝 열었다.
피아노 소리가 뚝 멈추고 서현우는 목구멍이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누구?”
윤소율이 몸을 돌리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서현우를 바라보며 물결치는 눈동자가 가볍게 휘어지더니 붉은 입술을 차갑게 말아 올렸다.
서현우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아니야. 그 여자가 아니야...’
하지만 저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윤소율.
연예계에 관심이 없지만 그 이름은 알고 있었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화제가 되며 인기몰이하는 젊은 여배우로 팬들로부터 ‘동양의 진주’, ‘할리우드 마녀’라고 불렸다.
[뷰티풀 우먼]이라는 작품으로 데뷔해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와 합을 맞추며 5년간의 노력 끝에 현재는 몸값이 수백억에 달하는 최상위 스타가 되었다.
수많은 상류층 여자가 윤소율의 옷차림을 따라 하는 동시에 그녀를 눈엣가시, 골칫거리로 여겼다.
서이안도 고개를 돌려 크고 선명한 눈동자를 반짝거리더니 서현우를 보고는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윤소율은 서현우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자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확신했다.
‘허,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얼굴에 있던 반점은 전부 사라지고 이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과거 못난이였던 죽은 아내가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 윤소율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윤소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 있던 서이안은 그녀가 떠나는 줄 알고 반짝이는 눈망울로 치마 끝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작은 입술을 굳게 다문 모습이 그녀가 떠나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윤소율은 아이가 꿈속에서 여러 차례 만났던 그 여자와 닮아있었다.
꼭 엄마 같았다.
꿈속에서 여자는 부드럽게 이름을 불러주며 품에 안아 주었다. 따뜻하고 든든한 품이었다.
윤소율이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제 가야 해.”
서이안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서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경찰서에서 진술을 마치고 회사로 가려던 윤소율은 아이에게 붙잡혀 갈 수가 없었다.
서씨 가문에서 아이를 데리러 왔는데도 서이안은 그녀의 품에 웅크린 채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윤소율이 아무리 달래도 서이안이 말을 듣지 않아 함께 올 수밖에 없었다.
서현우와 임채은의 아들이니 이렇게 챙겨서는 안 되었다. 특히 임채은 때문에 태아인 상태로 죽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서씨 가문은 결코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윤소율은 가능한 증오를 감추려 했다.
방 안에는 한 개의 조명만 켜져 있어 제법 어두웠다.
남자의 차가운 기운은 몇 미터 떨어져 있어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가정부가 설명했다.
“이분이 공항에서 작은 도련님을 구해주셨어요.”
서현우가 서이안 앞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아빠가 안아줄게.”
서이안은 고개를 돌려 윤소율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윤소율이 아이를 안아 올리자 서이안은 작은 얼굴을 그녀의 품에 묻으며 목을 감싸 안았다.
윤소율은 무심코 말했다.
“애가 그쪽이랑 안 친하네요.”
서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입 다물어요.”
윤소율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요. 안하무인으로 구는 것도 정도가 있죠. 그쪽 아들을 구해줬는데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도 없이 무시하는 게 아들 생명의 은인을 대하는 태도인가요?”
서현우는 차갑게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주도윤, 이안이 데려가.”
“네.”
주도윤이 다가와 서이안을 데려가려 하자 아이는 주도윤을 노려보더니 작은 다리로 그의 손을 걷어찼다.
“저리 가.”
서현우가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
“이안아.”
그 말투에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서이안은 그제야 마지못해 주도윤에게 안겼다.
주도윤이 아이를 안고 간 뒤 서현우는 뒤돌아 상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인사? 서씨 가문에서 뭘 해주길 바라죠? 원하는 걸 말해요.”
윤소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빛과 그림자 속에서 극도로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났다.
서현우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자 매혹적인 얼굴이 남자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서현우는 키 190에 압도적인 기운을 지녔지만 그런 남자 앞에서도 여자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숫자를 말했다.
“200억.”
남자는 날카로운 눈썹을 우아하게 치켜올렸다.
“200억?”
그는 무표정하게 의자에 앉아 얇은 입술을 살짝 열며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하듯 말했다.
“사기꾼인가?”
윤소율은 웃으며 말했다,
“사기? 서 대표님께선 사기가 범죄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요. 그 정도 위치면 발만 굴러도 전 세계 금융 시장이 휘청거릴 사람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대표님께 사기를 쳐요?”
서현우는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이유는?”
“대표님, 고작 200억이에요. 서씨 가문은 나라에 버금가는 재산을 지닌 집안인데 200억이 많은 건가요? 그 쪽에겐 귀한 아들이 200억의 가치도 없어요?”
서현우가 여자를 슥 훑어보았다.
200억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지만 그에겐 딱히 큰돈도 아니었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한 번도 그 앞에서 이렇게 큰 금액을 요구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표님, 200억도 없는 건 아니죠?”
윤소율은 서현우의 옆으로 걸어가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감싸며 귀에 대고 말했다.
“그럼 제가 대표님께 200억 드릴 테니까 오늘 밤 제 사람이 되는 건 어때요?”
서현우의 차가운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길고 깊은 눈매에 눈꼬리는 위로 올라가고 시선은 늘 서늘하고 차가웠다. 냉랭한 무관심뿐인 두 눈에는 온기나 감정 따위가 없었다.
윤소율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가 대표님이 인물 중의 인물이고 낮의 태양이자 밤의 달이라고 하던데, 이제 보니 정말 소문대로군요. 이런 남자라면 어떤 여자든 원하지 않겠어요?”
서현우는 차갑게 말했다.
“본인이 지금 뭘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내가 지금 뭘 하는지는 당연히 알죠. 이번에 현국으로 돌아온 목적도...”
윤소율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 때문에 왔거든요.”
서현우는 얇은 입술을 살짝 말아 올렸다.
‘재밌네. 오랜만에 이런 흥미로운 일이 생겼군.’
“도윤아.”
서현우가 부르자 주도윤은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서류 가방에서 수표책을 꺼냈다.
서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은 양복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른 손은 펜을 쥐고 있었다. 잘생긴 옆태는 말이 없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모였다.
윤소율은 팔짱을 낀 채 서재 안에서 자유롭게 걸어 다니다가 책상 앞에 가서 엎어진 사진 액자를 가볍게 뒤집었다.
세 사람의 가족사진이었다.
서현우, 임채은, 그리고... 서이안.
정말 화목한 가족이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다가오더니 강력한 손이 사진 액자를 책상 위에 뒤집어엎었고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언제 내 물건을 만져도 된다고 했죠?”
윤소율이 고개를 돌리니 이미 작성된 수표가 눈앞에 있었다.
윤소율은 그걸 받아들였다. 200억의 현금 수표, 아래에는 힘껏 휘갈긴 익숙한 사인이 있었다.
서현우.
그녀는 웃는 얼굴로 책상 위의 사진 액자를 돌아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5년 전 서씨 가문에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면서요.”
서현우의 얼굴이 굳어졌고 윤소율은 말을 이어갔다.
“듣기론 그 납치 사건에 서씨 가문 사모님인 윤서린 말고 대표님 애인인 연예인 임채은도 있었다던데, 대표님께서 200억으로 애인을 구하셨더라고요.”
윤소율은 손에 든 200억 수표를 만지작거리며 조롱하듯 말했다.
“200억이라. 불쌍한 그 여자와 배 속의 귀여운 아이들까지 함께 불길에 휩싸여 세 사람이 목숨을 잃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