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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배청아가 우울증이 가장 심했던 해, 배청아는 세상 모든 것이 더는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웠고, 숨을 쉬는 일마저 귀찮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배청아에게 남은 유일한 구원은 연인이자 심리의사인 서기백이었다. 그날도 배청아는 옷장 안에 숨어 있었다. 서기백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일정한 박자처럼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배청아는 그 발소리만으로도 서기백이 왔다는 걸 알아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서기백의 발소리 뒤로, 가볍고 들뜬 발걸음이 하나 더 따라붙었다. 배청아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바로 배청아의 여동생, 도하윤이었다. 배청아가 옷장 안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배청아는 숨을 더 죽인 채, 옷장 안쪽 가장 깊은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밖에서 도하윤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흘러나왔다. “기백 오빠, 여기 전망 진짜 좋네. 오빠가 여기서 우리 언니 치료해 주는 거야?” 서기백은 부드럽게 웃었다. 말투에는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러운 다정함이 섞여 있었다. “네가 좋으면 자주 와도 돼.” 그 한마디에 배청아의 심장이 바닥으로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차가운 예감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배청아는 옷장 틈 사이로 밖을 훔쳐봤다. 서기백의 팔이 도하윤의 가느다란 허리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감싸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 왔다는 듯한 손길이었다. 배청아는 숨이 턱 막혔다. 서기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인에게만 쓰는 지나치게 친밀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하윤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나는 평생 너만 사랑해.” 도하윤은 웃음을 터뜨리며 서기백의 가슴팍에 손끝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럼 우리 언니는? 오빠는 언니 주치의잖아.” 서기백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다정함보다, 모든 것을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둔 사람의 무심함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넌 왜 그렇게 매정한 거야? 내가 배청아의 의사 노릇을 하는 게 누구 때문인데.” 서기백은 말을 잠깐 끊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도하윤에게 더 가까이 얼굴을 붙이며, 마지막 말을 속삭이듯 내뱉었다. “배청아를 치료해서 나 없이는 못 살게 만들면, 내가 방향만 살짝 틀어도 스스로 죽는 쪽으로 가게 돼.” 서기백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서기백은 마지막 한마디를 못 박듯 말했다. “배청아가 가진 건 전부 네 것이 돼. 배청아의 재능도, 명성도, 원래 네 것이어야 했던 것들도 전부 다...” 옷장 안에서 배청아의 몸이 크게 떨렸다. 이를 악물어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배청아는 두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고 소리가 새지 않게 억눌렀다. 도하윤은 부모 손바닥 안에서 자란 아이였고 반대로 배청아는 버려진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늘 그랬다. 배청아가 가진 것 가운데 도하윤이 한 번이라도 탐을 내면, 결국 마지막에는 도하윤 것이 되었다. 새로 산 원피스를 도하윤이 한 번 더 오래 바라보기만 해도, 엄마는 배청아의 몸에서 그 옷을 그대로 벗겨 갔다. 배청아가 밤새워 그린 그림을 도하윤이 찢어버리면, 아버지 도명석은 도하윤을 꾸짖기는커녕 잘했다고 칭찬했다. 배청아가 피땀 흘려 붙은 미대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는 배청아에게 재수를 강요했고, 배청아의 자리를 도하윤에게 주려고 했다. 배청아가 한 작품으로 단숨에 이름을 알린 그림, 〈허허벌판〉도 그랬다. 도하윤이 유명해지고 싶다고 말하면, 부모는 배청아를 몰아세워 밖에 나가 그 작품은 도하윤 그림이라고 말하게 했다. “언니가 동생을 좀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 않니?” “청아야, 너는 좀 철 좀 들어. 우리가 너 키워준 게 얼만데, 집안에 기여도 좀 해야지.” 배청아가 가진 재능도, 배청아가 버틴 시간도, 배청아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은 결국 도하윤의 길을 닦는 도구로만 쓰였다. 원가족이 만든 지옥 같은 일상에서 배청아는 우울증에 걸렸다. 밤마다 가슴이 짓눌려 잠을 못 잤고, 매일 죽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죽고 싶다고? 너는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니! 네가 죽으면 하윤이 그림은 누가 그려?” 아버지 도명석은 약병을 바닥에 집어 던져 산산조각 냈다. “미친 척 그만해! 네 동생 잘되는 게 넌 그렇게 배 아픈 거야?” 가족이 더 몰아붙일수록 배청아는 더 무너졌고, 배청아의 병이 깊어질수록 부모는 더 잔인해졌다. “다음 달 하윤이 전시회에 신작 열 점을 내야 해. 그거 다 그리기 전까지 잠은 생각하지 마! 의사가 우울증이라고 했다고? 웃기지 마. 너는 맞아야 정신 차려! 무슨 우울증이야, 한 대 맞으면 다 낫지!” 그날 밤, 부모는 1층에서 도하윤의 축하 파티를 열었다. 웃음소리와 건배 소리가 바닥을 타고 위로 올라왔다. 배청아는 깜깜한 작업실에 혼자 앉아 미술용 커터칼을 집어 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을 손목에 대고, 한 번, 또 한 번 그었다. 피가 흐르는데도 통증이 점점 무뎌졌다. 배청아는 자기 피가 바닥으로 번져 가는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그때였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서기백이 뛰어 들어왔다. “칼 내려놔!” 서기백은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배청아에게 달려들어 칼을 빼앗으려 했다. 두 사람이 엉켜 버둥거리는 순간, 칼끝이 서기백의 왼쪽 가슴을 깊게 찔렀다. 피가 한순간에 쏟아졌다. 서기백은 배청아의 눈을 손으로 가리며 배청아를 꽉 끌어안았다. “청아야, 보지 마. 내가 있어.” 병실에서 창백해진 서기백을 바라보던 그 순간, 얼음처럼 굳어 있던 배청아의 마음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배청아를 위해 피를 흘려준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1년 뒤, 항우울제 부작용으로 배청아의 신장이 심각하게 망가졌다. 담당 의사는 맞는 신장이 제때 나오지 않으면 석 달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했다. 서기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수술대에 올라갔다. “제 신장이 배청아에게 맞을 겁니다.” 서기백은 주치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한 사람만 살 수 있다면, 살아야 하는 사람은 배청아입니다.” 배청아는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배청아가 그토록 단단하게 쌓아 올렸던 마음의 벽이 그날 완전히 무너졌다. 심리의사가 환자를 사랑하는 일은 업계에서 금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기백이 있는 병원에는 신고가 들어갔다. 윤리위원회 조사 자리에서 서기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똑바로 바라봤다. “사랑은 죄가 아닙니다. 저는 제 환자 배청아를 사랑합니다. 저는 제 의지로 신장을 내어줬고, 그 선택의 결과도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서기백의 의사 면허는 그 자리에서 취소됐다. 사람들은 모두 서기백이 미쳤다고 했다. 서기백은 그런 말에 상관없다는 듯 배청아의 손을 꼭 잡고 웃었다. “청아야, 사랑은 워낙 헌신하는 법이야. 내가 너를 위해 한 일은 전부 가치가 있어.” 그 순간 배청아는 처음으로 세상에 정말로, 자기 생명보다 배청아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배청아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서기백이 배청아를 살린 것도, 신장을 내어준 것도, 전부 도하윤을 위한 일이었다. 배청아가 살아야 했던 이유는 배청아가 행복해져서가 아니라, 배청아가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해서였다. 도하윤의 대필로, 도하윤이 더 유명해지도록, 도하윤이 더 빛나도록 말이다. 배청아는 다시 죽고 싶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억울했다. 배청아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배청아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도하윤은 배청아의 그림을 자기 이름으로 내걸고 모든 찬사를 독차지할 것이고, 서기백은 헌신적인 연인이라는 가면을 쓴 채 계속 배청아를 조종할 것이고, 부모는 골칫거리 하나를 치웠다며 속이 시원해질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웃는 건 그들뿐이었다. 그리고 배청아는 죽어서도 자기 이름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한다. ‘내가 왜?’ 배청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겁고 거친 분노가 솟구쳐, 죽음 같은 절망을 단숨에 밀어냈다. ‘서기백은 연기하는 걸 좋아하잖아.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나. 내가 서기백에게 기대고, 서기백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망가져 가는 걸 보고 싶어 했잖아? 좋아. 나도 똑같이 연기해 줄게.’. 배청아는 계속해서 연약한 배청아로 살 거고, 서기백을 믿고 의지하며, 서기백이 없으면 못 산다고 매달리는 환자로 남을 것이다. 배청아는 얌전히 약을 먹고, 치료받으며, 심지어... 서기백이 원하는 방향대로 죽는 척까지 해 줄 것이다. 배청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옷장 밖으로 나와 거울 앞에 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누가 움직이라고 해서 움직이는 도구가 아니었다. 배청아가 되찾을 것은 그림과 명성만이 아니라, 반드시 이 모든 사람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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