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서기백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손에는 물 한 잔과 알약 몇 개가 들려 있었다.
배청아는 소파에 웅크린 채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도자기 인형처럼 눈빛이 텅 비어 있었다.
“청아야, 약 먹을 시간이야.”
서기백이 가까이 다가와 물컵과 알약을 배청아 앞에 내밀었다.
배청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무거운 눈빛이 알약 위로 내려앉았다.
배청아는 기억력이 유난히 좋았다. 특히 색과 디테일에는 더 예민했다. 이전에 먹던 약은 완전히 무광의 흰색이었다. 저렇게 이상한 푸른 빛이 비칠 리가 없었다.
서기백이 약을 바꿨다.
그런데도 배청아는 어딘가 기대어 매달리는 듯한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우리 청아야.”
서기백이 배청아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배청아는 망설임도 없이 알약을 입안에 넣었다.
바로 그때, 배청아의 부모와 도하윤이 들어왔다. 배청아는 약을 씹는 척하다가, 조용히 손바닥에 뱉어 숨겼다.
도하윤이 투덜댔다.
“엄마, 아빠. 그 자선 전시회 말이야. 나 신작이 없으면 어떻게 해? 기자들이 다 보고 있는데!”
어머니 최미경이 바로 받아쳤다. 목소리가 날카롭게 꽂혔다.
“배청아는 어디 있어? 배청아보고 그리라고 해. 걔는 이제 괜찮다며?”
부모는 거침없이 거실로 들어왔고, 소파에 앉아 초췌하게 주저앉아 있는 배청아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시선은 곧장 서기백에게로 향했다.
도명석이 입을 열었다. 늘 그래 왔다는 듯, 명령하는 말투였다.
“기백아, 하윤이 전시회는 중요해. 배청아한테 약 좀 처방해서 그림 그리게 해.”
서기백이 배청아를 한 번 바라봤다. 그러고는 도하윤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청아는 요즘 상태가 안정적이야. 그림 몇 점 그리는 건 문제없어.”
서기백은 다시 배청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투에는 조용히 길을 틀어 주는 듯한 유도가 섞여 있었다.
“청아야, 부모님이랑 관계 회복하고 싶다고 늘 말했지? 하윤이를 도와줄 거지? 너희는 자매잖아.”
배청아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멍했고, 말을 이해하려 애쓰는 표정이었다.
부모의 얼굴에는 점점 짜증이 쌓였고, 도하윤은 웃고 있지만 눈 끝에는 위협이 숨겨져 있었다.
배청아는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는 모깃소리만큼 가늘었다.
“응.”
부모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배청아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눈동자에 남은 것은 무감각한 순종뿐이었다.
배청아는 결국 붓을 들었다.
도하윤이 원하는 시각적 충격에 맞춰,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속은 뒤틀린 추상화가 캔버스 위에 쌓여 갔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겹겹이 덧칠한 짙은 유화 물감 아래, 캔버스 가장 밑바닥의 스케치 선들 속에서 배청아는 아주 가느다란, 바탕색과 섞이면 거의 보이지 않는 특수 물감으로 자신의 이름을 수없이 되풀이해 적고 있었다.
[배청아.]
묻힌 비밀 같은 이름이자 가짜 영예의 아래 잠복한 채, 언젠가 다시 빛을 보기를 기다리는 이름이었다.
그림이 완성되자마자, 도하윤은 기다렸다는 듯 그림을 가져가 버렸다.
기자회견 날.
도하윤은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서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구석에 앉아 있던 배청아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사실 이번 그림의 영감은... 제 언니 우울증에서 왔어요.”
순간 장내가 술렁였다. 모든 카메라가 한꺼번에 배청아를 향했다.
도하윤은 달콤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언니가 손목을 그을 때 모습이 정말 예뻤거든요. 피가 팔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선이 저한테는 큰 영감이 됐어요. 약 먹고 자살하려다가 몸을 떨던 모습도요. 그 절망한 표정 같은 건... 최고의 창작 소재였어요.”
기자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렌즈가 배청아의 얼굴을 파고들었다.
“배청아 씨, 손목을 그을 때 무슨 생각을 했나요?”
“죽어가는 느낌은 어땠어요? 직접 묘사해 주실 수 있나요?”
배청아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플래시는 눈앞에서 새하얀 빛 덩어리로 번졌다.
배청아는 갑자기 의자에서 힘이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바닥에 웅크린 채, 온몸을 떨었다.
“하지 마... 찍지 마세요.”
배청아가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고 목소리는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기자들은 더 신이 났다. 어떤 기자는 배청아 앞에 쪼그려 앉아 마이크를 입가까지 들이밀었다.
“지금도 죽고 싶어요?”
“배청아 씨, 말 좀 해 봐요! 불쌍한 척 그만해요.”
배청아는 머리로 바닥을 찍기 시작했다. 그러자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심지어 자기 머리칼을 뜯어 쥐고 울부짖었다. 몸부림치는 사이 치맛자락이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가며, 발작할 때 스스로 긁었던 상처로 가득한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살려줘요.”
배청아가 서기백에게 손을 뻗었다.
서기백은 이성을 잃은 듯 기자들을 거칠게 밀쳐 냈다.
“비켜! 당장 비켜!”
서기백은 왜 그렇게 불안한지 스스로도 설명이 안 됐다. 서기백은 곧장 무릎을 꿇고 앉아 몸으로 일부 카메라를 막았다. 목소리가 떨릴 만큼 급했다.
“청아야, 진정해. 나만 봐. 숨 쉬어.”
무대 위 도하윤은 마이크 앞에서 가볍게 웃었다.
“제 언니는 그냥 미친 사람이에요. 제 재능이 부러운 나머지, 맨날 아픈 척하면서 동정받으려고 했거든요.”
도하윤은 달콤하게 말끝을 올렸다.
“그래도 덕분에 저는 좋은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언니의 그 미친병 때문이죠.”
그때 최미경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로서도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청아는 어릴 때부터 마음이 어두웠어요. 하윤이처럼 명랑하지 못했지요.”
도명석도 뒤이어 말했다.
“하윤이가 경험을 작품으로 풀어내 주지 않았으면, 그런 일들은 아무 가치도 없었을 겁니다.”
그날 밤, 배청아가 바닥에서 구르며 발작하는 영상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배청아 정신병 발작#
#도하윤 고통 속에서 창작#
배청아는 비린 피 맛이 혀끝에 번질 때까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배청아는 고개를 숙였고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표정을 가렸다.
목걸이 안에 숨겨 둔 초소형 카메라가, 도하윤이 얼마나 뻔뻔하게 배청아 작품을 훔쳐 왔는지, 얼마나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댔는지 전부 기록하고 있었다.
배청아는 가장 우쭐해진 순간에, 가장 처참하게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창밖은 짙은 밤이었다.
배청아의 눈빛은 밤보다 더 차가웠다.
이 연극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배청아는 이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갈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