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입 벌려.”
서기백은 분홍색 알약을 손가락으로 집어 배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 손길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눈빛 한구석에 잠깐 흔들림이 스쳤다가 이내 차갑게 맑아졌다.
서기백이 사랑하는 사람은 도하윤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하윤뿐이고, 배청아는 서기백이 쥐고 흔들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자.’
배청아는 순순히 알약을 삼켰다. 하지만 30분도 지나지 않아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 눈앞의 풍경이 전부 흔들렸다.
“이 약은 너무 괴로워.”
배청아가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말했다.
“괴로워야 정상이야.”
서기백이 미소 지었다.
“약효가 있다는 뜻이니까. 지금은 푹 쉬어야 해.”
그때 도하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소파에 축 늘어진 배청아를 보자 도하윤은 코웃음을 쳤다.
“어머, 대단한 화가님 아니야? 왜 죽은 물고기처럼 저기 처박혀 있어?”
도하윤은 일부러 배청아의 앞을 왔다 갔다 하며 비웃다가, 갑자기 가방에서 액자 하나를 꺼냈다.
“이게 네가 그렇게 아끼는 할머니 사진이라면서? 그런데 말이야, 사람도 죽었는데 이런 쓰레기 같은 걸 왜 계속 갖고 있어?”
“돌려줘...”
배청아가 몸을 일으키려 버둥댔지만, 약기운 때문에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도하윤은 액자를 높이 치켜들었다.
“나한테 빌어. 어릴 때 새로 산 원피스 돌려달라고 빌던 것처럼.”
약 때문에 배청아의 시야는 흐릿하게 번졌지만, 깨진 유리 너머로 보이는 할머니의 인자한 얼굴만큼은 어렴풋이 잡혔다.
“저... 그게...”
배청아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제발...”
배청아는 떨리는 팔로 상체를 간신히 들어 올렸다. 약이 들어간 몸은 움직일 때마다 무겁게 가라앉았고, 작은 동작 하나도 숨이 끊어질 만큼 힘들었다.
배청아는 중심을 못 잡고 결국 무릎을 바닥에 세게 꿇었다.
“제발... 하윤아... 사진... 돌려줘...”
도하윤은 만족스럽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도하윤은 배청아가 바닥에 엎드리듯 비는 모습을 오래 감상하듯 바라봤다.
“진짜 말 잘 듣는 개네. 그런데...”
도하윤이 말끝을 꺾으며 눈빛을 독하게 바꿨다.
“나 마음 바꿨어.”
도하윤이 손을 놓아버리자 액자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안 돼!”
배청아는 그대로 굳은 채, 액자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걸 눈앞에서 봤다. 유리는 산산조각 났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어 도하윤의 하이힐이 번쩍 들리더니, 유리 파편 사이에 떨어진 사진 위로 거칠게 내려앉았다. 도하윤은 할머니 얼굴이 찍힌 부분을 일부러 짓이기듯 밟아 문질렀다.
“아, 어떡해. 손이 미끄러졌네.”
도하윤은 억울한 척 두 손을 펼치며, 가볍고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너 지금 정신도 온전치 않잖아. 이런 쓰레기 같은 사진이 무슨 소용이야? 보기만 해도 재수 없어.”
“도하윤!”
약기운으로 눌러져 있던 분노와 절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배청아는 자기도 모를 힘으로 몸을 던졌다. 바닥에서 벌떡 몸을 던지듯 일어나 도하윤을 향해 돌진했고, 그대로 도하윤을 세게 밀쳤다.
“아!”
도하윤은 방심한 채 밀려나며 비틀거렸다. 허리가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히자, 도하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배청아, 미쳤어?”
그 순간, 소란을 듣고 서기백이 빠르게 달려왔다.
서기백은 바닥에 널린 유리 조각들과 울부짖는 도하윤을 한 번 훑어보더니,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배청아!”
서기백이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서기백은 성큼 다가와 배청아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힘이 너무 세서 배청아가 숨이 턱 막힌 소리를 냈다.
“또 무슨 난리를 치는 거야!”
“도하윤이 먼저 그랬어! 할머니 사진을...”
배청아는 버둥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서기백은 바닥의 사진 조각을 보지도 않았다. 서기백은 실망과 냉기가 섞인 눈으로 배청아만 바라봤다.
“하윤이는 널 보러 온 것뿐이야. 그런데 이렇게 다치게 해?”
서기백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배청아, 정말 실망이야.”
서기백은 주머니에서 진정제를 꺼냈다.
“아니야. 기백아, 이러면 안 돼! 하윤이 먼저...”
배청아가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서기백은 배청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서기백의 손아귀가 배청아를 바닥에 눌러 붙잡았다.
“진정해야 해.”
그러자 차가운 바늘이 배청아의 팔에 꽂혔다.
약효는 금세 퍼졌다. 배청아의 몸에서 힘이 빠지며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가운데, 배청아는 도하윤의 만족스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기백 오빠, 배청아는 늘 저렇게 발작하잖아. 나 다치면 어떡해?”
“걱정하지 마.”
서기백의 목소리는 다시 다정해졌다.
“앞으로는 내가 잘 보고 있을게. 약을 더 늘려야겠네.”
서기백은 태연하게 덧붙였다.
“새 처방이면 청아도 더 얌전해질 거야.”
서기백은 배청아를 치료 의자에 눕히고, 커튼을 끝까지 쳤다. 서기백은 방 안을 어둡게 만든 뒤 마음을 가라앉히는 향을 피웠다.
“자, 오늘 치료를 시작하자.”
서기백의 목소리가 어둑한 방 안에서 또렷하게 울렸다.
“이제 편안해질 거야. 아주, 아주 편안해질 거야...”
배청아는 시야가 점점 더 흐려졌다. 귀에는 서기백의 낮은 목소리만 남았다.
“배청아는 모자란 사람이야. 서기백에게 기대야만 살아갈 수 있어. 배청아는 도하윤을 빛내기 위해 존재해. 그게 배청아가 존재하는 이유야. 서기백 말고는, 아무도 이런 배청아를 받아주지 않아...”
배청아는 머리가 찢어질 듯 아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지옥 같은 속삭임이 멎었을 때쯤, 서기백과 도하윤이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고 한참이 지난 뒤, 배청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배청아의 손등에는 유리 파편이 박혀 있었다. 상처 사이로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통증은 배청아가 최면에 완전히 잠기지 않게 붙잡아 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서기백이 진정제를 놓는 순간, 배청아는 할머니 액자의 유리 조각을 손바닥 안에 숨겨 꼭 쥐고 있었다.
배청아는 속옷 안쪽에서 초소형 녹음기를 꺼냈다.
녹음기 안에는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배청아는 파일을 조심스럽게 백업한 뒤, 암호화된 기록장에 한 줄씩 적어 내려갔다.
[11월 3일, 서기백이 심층 최면을 진행하며 자기 부정 인식을 주입하려 했다. 도하윤이 일부러 할머니의 사진을 훼손. 증거 확보 완료.]
할머니 사진에 간 금을 바라보며 배청아의 눈빛이 서서히 단호해졌다.
“할머니... 저 할 수 있어요.”
배청아는 유리 조각을 하나하나 소중히 챙겨 넣으면서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언젠가 반드시, 모두가 보게 만들 것이다. 멀쩡한 얼굴로 선 그 사람들이 얼마나 비열하게 한 사람을 끝까지 몰아붙였는지,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을 절벽 끝으로 밀어 넣었는지 말이다.
배청아는 표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아무 감정도 없는 꼭두각시로 돌아갔다. 조용히 감옥으로 걸어 들어가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차피 이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배청아는 계속 끝까지 연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