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초겨울 거리에는 가느다란 비가 끈질기게 내리고 있었다.
서기백은 우산을 받쳐 들고 배청아와 나란히 인도를 걸었다.
“청아야.”
서기백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배청아를 돌아봤다. 배청아는 서기백의 얼굴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읽었다.
“너... 나를 사랑해?”
배청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배청아는 겁을 먹은 듯 서기백만 바라보면서도, 이상할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 기백아... 나한테는 너뿐이야.”
그 순간 서기백은 심장이 누군가에게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쿵 하고 울리는 걸 느꼈다. 낯선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서기백의 이성을 단숨에 무너뜨릴 듯했다.
서기백의 눈빛에는 아주 미세한 당황과, 억누르기 힘든 흔들림이 뒤엉켜 소용돌이쳤다.
서기백은 입술을 벌렸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 이 통제 불가능한 분위기를 끊어내려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을 확인하려는 것인지, 서기백 자신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비 내리는 소리를 찢어내듯, 날카로운 엔진 굉음이 갑자기 들려왔다.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속도를 올리더니, 그대로 인도로 돌진했다. 그리고 목표가 분명하다는 듯 서기백이 서 있는 자리로 곧장 들이받았다.
“조심해!”
서기백은 조금 전 질문과 대답에서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거대한 힘에 옆으로 밀려났다.
서기백을 밀쳐낸 사람은 배청아였다.
배청아는 거의 반사적으로 서기백을 밀어냈다.
대신 배청아는 가운 차 앞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쾅!”
무거운 충돌음이 빗소리 속에서 둔탁하게 울렸다.
서기백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나다가 바닥에 넘어졌다. 서기백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고, 배청아가 충격에 튕겨 나가 몇 미터 앞의 젖은 바닥으로 내던져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말았다.
배청아의 왼팔은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여 있었다. 이마 한쪽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려, 창백한 얼굴과 고인 빗물을 순식간에 붉게 물들였다.
“청아야!”
서기백은 거의 기어가다시피 배청아에게 달려갔다.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꽉 쥐인 듯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서기백은 기운이 희미해진 배청아를 끌어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왜... 왜 그렇게까지...”
늘 모든 걸 계산하던 서기백의 눈에는 지금 충격과 공포, 그리고 감당하기 힘든 후회와 통증만 남아 있었다.
‘이건 계획이랑 달라. 신호도 주지 않았는데 왜 미리 움직였지.’
배청아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피 묻은 손가락으로 서기백의 옷자락을 간신히 붙잡았다.
배청아의 목소리는 거의 숨소리였다.
“날 버리지... 말아줘... 나한테는... 너뿐이야.”
그 말이 끝나자 배청아의 눈빛이 툭 꺼졌고, 배청아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서기백은 배청아를 꼭 끌어안은 채 주변 사람들에게 미친 듯이 소리쳤다.
“구급차 불러. 빨리! 청아를 살려야 해. 반드시 살려야 해.”
병원 진단 결과는 왼팔 분쇄 골절, 뇌진탕, 다발성 연부조직 타박상이었다.
서기백은 병상 곁을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다. 서기백은 직접 손으로 배청아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서기백은 숨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축 늘어진 배청아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눈빛에는 서기백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배청아의 현실은 곧바로 서기백을 다시 차갑게 삼켜 버렸다.
최미경과 도명석, 그리고 도하윤이 다급하게 병실로 들이닥치자마자 최미경이 먼저 서기백에게 퍼부었다.
“이게 뭐야? 많아야 가벼운 부상이라며!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다쳤어?”
최미경은 병상 쪽을 힐끗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손이 다 망가지면 앞으로 하윤이 그림은 누가 그려?”
도명석은 아예 병상을 빙 둘러 지나가며 배청아를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그러더니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게 없네. 길 걷다가도 사고를 당해? 재수 없게.”
도하윤은 곧장 서기백의 팔에 매달리듯 팔짱을 꼈다. 목소리는 한껏 애교로 물들어 있었다.
“기백 오빠, 오빠만 무사하면 됐어요.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도하윤은 고개를 돌려 의식 없는 배청아를 역겹다는 듯 쳐다봤다.
“언니도 참... 죽을 거면 멀리 가서 죽지, 꼭 길바닥에서 이런 쇼를 해. 모르는 사람은 우리 집이 언니 학대하는 줄 알겠네.”
최미경이 곧바로 맞장구쳤다.
“맞아. 무슨 깊은 정이라도 있는 척은... 정신병자 주제에.”
최미경은 도하윤의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덧붙였다.
“하윤아, 겁내지 마. 엄마가 있잖아.”
도명석은 손을 내젓듯 퉁명하게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안 죽었으니까 병원에나 처박아 둬. 집에 돌아와서 눈앞에 띄지 말고. 기백아, 하윤이는 내일 인터뷰도 있으니까 우리는 먼저 갈게.”
배청아는 찢어질 듯한 통증 속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하필 그 대화를 그대로 들었다.
배청아는 속으로 웃었다.
‘오늘 일은... 전부 저 사람들이 꾸민 거였네.’
배청아는 서기백의 작업실에 두었던 녹음 인형이 그들의 대화를 전부 담아 두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백이 내일 밤에 차로 한 번 치게 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이건 그냥 확인이야. 이 애가 진짜 조련된 건지,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널 지킬 수 있는지 보려고.”
도명석의 목소리였다.
이어 도명석이 더 냉정하게 덧붙였다.
“그걸 통과하면 세뇌가 완전히 성공한 거지. 그러면 하윤이를 위해 죽을 때까지 깔아줄 거야.”
서기백의 목소리도 그 안에 있었다. 오싹할 만큼 차분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테스트는 실수 없이 진행됩니다. 충돌 각도와 힘은 조절하겠습니다. 많아야 가벼운 부상입니다.”
배청아는 그 녹음을 들었을 때도, 이미 죽어버린 줄 알았던 마음이 다시 산산이 부서지는 걸 느꼈다.
저 사람들은 서기백의 목숨까지 미끼로 던져 배청아를 시험하려고 했다.
하지만 배청아는 알고 있었다.
완벽하게 믿음을 얻으려면,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배청아는 더 잔혹하게 만들기로 했다.
배청아가 스스로 그 차 앞으로 들어가면 되었다.
배청아는 속으로 문장을 외우듯 되뇌었다.
그리고 배청아는 기록을 남겼다.
[12월 5일. 인위적으로 교통사고를 만들어 충성도를 테스트함. 왼팔 분쇄 골절, 뇌진탕. 서기백에게 강한 동요와 통제 불능의 흔들림이 관찰됨. 최미경과 도명석의 냉담함이 더 노골적으로 확인됨. 핵심 증거 확보 완료. 녹음에는 서기백과 가해자 지시 통화 및 사후 반응이 포함됨.]
배청아는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이 정도면 이제는 믿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