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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서기백은 병상 곁을 지키며 잠든 배청아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봤다. 배청아가 차를 막아섰던 그 순간, 결연하게 번뜩이던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낯선 연민이 통증처럼 서기백을 갉아먹었다. 서기백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배청아의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펴 주고 싶었다. 그때 도하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기백 오빠... 기자들이 너무 무서워. 병원 입구에 몰려서... 언니가 진짜 미친 거 맞냐고 물어봐. 나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평소라면 서기백은 곧바로 달래 줬을 것이다. 하지만 도하윤의 흐느낌을 듣는 순간, 서기백의 눈앞에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도 서기백을 향해 웃던 배청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기백은 처음으로 그 울음소리가 어딘가 거슬린다고 느꼈다. 서기백이 도하윤 말을 끊었다. “하윤아, 청아가 방금 수술을 끝냈어. 지금은 안정이 필요해.” 그러자 도하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배청아가 어쨌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기백 오빠, 내가 오빠가 지켜야 하는 사람이잖아. 배청아는 그냥 정신병자야! 나를 위해 길 깔아주는 도구일 뿐이라고! 정신 차려.” 도구라는 두 글자가 찬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서기백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정신이 번쩍 든 서기백은 속으로 되뇌었다. ‘나 지금 뭘 하고 있지. 겨우 체스 말 하나 때문에, 도하윤에게 했던 약속을 흔들릴 뻔했어?’ 배청아가 몸을 던져 차를 막아선 일은, 서기백이 치료에 성공했다는 증거였다. 서기백이 원하던 절대적인 충성, 그 결과가 바로 이런 행동이었다. 서기백은 깊게 숨을 들이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럽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안해, 하윤아. 내가 잘못했어. 겁내지 마. 기자 문제는 내가 바로 처리할게.” 전화를 끊은 서기백은 병상 위 배청아를 내려다봤다. 서기백의 눈빛에는 죄책감이 비쳤지만, 그보다 더 크게 눌러 담은 짜증이 엉겨 있었다. 서기백은 흔들리면 안 됐고 계획은 계속되어야 했다. 서기백이 몸을 숙여 배청아의 이불을 조심스럽게 끌어 올려 정리했다. “청아야...” 서기백은 낮게 중얼거렸다. 배청아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을 설득하는 말인지 서기백조차 알 수 없었다. “청아는... 병이 너무 깊어.” 서기백의 눈빛에 남아 있던 마지막 망설임이 사라지자 얼굴에는 다시 냉정하고 단정한 가면이 씌워졌다. 퇴원하는 날, 최미경과 도명석이 드물게 함께 나타났다. 도명석이 서류 뭉치를 내밀며 말했다. “청아야, 이거 다 서명해.” 도명석 목소리는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단호했다. “자발적 증여 계약서야. 배청아 명의로 된 그림들 저작권을 전부 하윤에게 공식적으로 넘기는 거고, 이것도 서명해. 가문 재산에 대한 상속권은 전부 포기한다는 내용이야.” 배청아가 서기백을 올려다봤다. 서기백은 배청아의 시선을 피했다. 목소리는 다정한 듯했지만, 속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청아야, 말 잘 들어. 하윤이는 이게 필요해. 하윤이가 자리 잡으려면... 꼭 필요해.” 서기백이 한 박자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청아야, 너에게는 내가 있잖아. 배청아는 나를 제일 사랑하잖아. 그렇지?” 배청아는 고개를 숙였다. 눈 밑으로 짧게 증오가 스쳤지만, 배청아는 얌전히 펜을 잡고 이름을 적었다. 그날 밤, 서기백은 배청아를 치료실로 데려갔다. 치료실은 다시 꾸며져 있었다. 조명은 일부러 어둡게 낮춰졌고, 진정 향의 냄새가 숨이 막힐 만큼 짙었다. 그리고 도하윤이 치료실 구석, 그림자 속에 앉아 있었다. 도하윤의 입가에는 구경꾼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때 서기백이 입을 열었다. “청아야, 마지막 치료를 하자.” 서기백의 목소리에는 사람 마음을 흐리게 만드는 기묘한 힘이 실려 있었다. “청아야, 넌 전에 없던 평온을 느끼게 될 거야. 그리고 마음속에 숨겨 둔, 가장 솔직한 생각을 말하게 될 거야...” 배청아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배청아의 의식은 팽팽하게 당겨진 줄처럼 긴장해 있었다. 배청아가 미리 화분 안에 숨겨 둔 초소형 녹음 장치는 이미 작동 중이었다. 희미한 빨간 불빛이 한 번 깜빡였다. 서기백이 천천히 유도했다. “배청아는 어릴 때부터 하윤이를 질투했지?” 배청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마치 버티는 듯했다. 그러다 끝내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래... 하윤이를 질투했어... 하윤이는... 너무 많이 가졌으니까...” 서기백이 더 깊이 밀어붙였다. “배청아의 재능은 이미 말라버렸어. 하윤이가 배청아의 작품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 줬지.” 배청아 목소리가 고통스럽게 떨렸다. “나... 이제는 못 그려... 하윤이만 할 수 있어.” 서기백이 다시 물었다. “청아는 모든 걸 하윤에게 주고 싶지? 청아의 명성도, 미래도...” 배청아는 누가 줄을 당기는 꼭두각시처럼 대답했다. “응... 다 줄게... 전부 하윤이한테...” 서기백 유도는 점점 더 깊어졌다. 배청아의 의지를 완전히 뒤틀어 놓으려는 듯했다. 배청아는 손목에 박힌 통증으로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배청아는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간신히 마음속 성벽을 붙들고 버텼다. 배청아의 목소리가 어딘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해졌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있지... 처음 만났을 때... 칼과 피...” 서기백은 승리를 확신한 탓인지, 도하윤에게 성과를 과시하고 싶은 탓인지, 배청아 말에 그대로 대답해 버렸다. “그건 하윤이가 너의 모든 걸 필요로 했기 때문이야. 처음 만난 날부터 전부 내가 널 위해 짜 놓은 무대였어. 그 칼날, 그 피... 전부 네가 나에게 의지하게 만들려고 준비한 거였고.” 구석의 도하윤이 웃음을 흘렸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언니가 구원이라고 믿었던 건 처음부터 끝까지 기백 오빠가 언니한테 써 준 대본이었어. 언니가 자발적으로 사라지면 나는 천재 화가 타이틀 달고 멋지게 은퇴할 거야. 그리고 패션계로 갈 거고. 누가 날마다 물감이랑 씨름하고 싶겠어?” 배청아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화분 속 녹음 장치가 그 탐욕과 죄악을 빠짐없이 삼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기백이 가장 치명적인 질문을 던졌다. “세상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배청아는 영원한 안정을 원하지 않니?” 배청아는 서기백이 무엇을 끌어내려는지 알고 있었다. 서기백은 배청아의 입으로 스스로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게 만들고 싶었다. 배청아는 크게 저항하는 척했다. 숨이 가빠지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모든 게 텅 비어버린 사람처럼, 기운 없는 목소리로 끝내 말했다. “응... 너무 지쳤어... 이제는... 완전히 쉬고 싶어.” 서기백이 만족한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도하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하윤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경멸이 실려 있었다. 마치 이제 골칫거리 하나 치웠다는 듯했다. 치료가 끝나자 서기백과 도하윤은 함께 치료실을 빠져나갔다. 배청아는 치료 의자에 홀로 누운 채, 한참 뒤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배청아의 맑은 눈동자에는 조금 전까지의 혼란도, 의존도, 무력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배청아는 녹음 장치를 꺼내 손에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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