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99번째로 서울의 신흥 권력자가 벌인 정사의 뒤처리를 하던 때에 백하임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장 의사 신분으로 다시 복귀할래요. 만약 죽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을 거고요.”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때 네가 선호 치료비 마련하려고 그 생지옥에 갔던 거 알지? 그러다 목숨 잃을 뻔도 했잖아. 선호랑 다시 만난 지 이제 1년도 안 됐는데... 정말 후회 안 해?”
백하임은 거울 속에 비친 뼈만 남은 듯 초췌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어린 동생을 홀로 키워냈다.
졸업 후에는 서울 최고의 병원에서 일할 수도 있었지만 백하임이 선택한 건 전쟁터였다.
총알이 허벅지를 관통해도, 폭발로 인해 팔 하나를 잃어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후회 안 해요. 열흘 뒤에 차 한 대만 보내줘요.”
전화를 끊은 백하임은 의수로 바닥에 흩어진 콘돔들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지난 반년 동안 고선호는 매일 밤, 다른 여자를 데려와 문밖에서도 생생히 들릴 만큼 그들의 신음을 흘려보냈다.
매번 끝나면 백하임에게 뒷정리를 시켰고 심지어 사랑을 나눈 상대에게 임신이 쉽게 되도록 도움을 주는 약까지 직접 처방하게 했다.
이 모든 건 다 전에 그녀가 고선호를 배신했던 일 때문이다.
즉, 아직 그는 그 일을 잊지 못해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는 것이다.
백하임은 매번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빠져나갔지만 이번엔 달랐다.
일주일, 밤과 낮이 바뀌도록 그녀의 발은 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학대하듯 그대로 묵묵히 버텼다.
첫날, 백하임은 의수로 고선호의 소매를 붙잡고 눈이 붉어진 채 따져 물었다.
“왜... 왜 내 동생까지 건드린 거야?”
하지만 고선호의 눈빛은 감정 하나 없이 냉랭하고 차분했다.
“그때 넌 나랑 네 동생을 봐줬었니?”
다섯째 날, 고선호는 백하임에게 여동생을 위해 보양식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주방의 불빛이 그의 손끝에서 일었다 꺼졌다 할 무렵, 남자는 흐뭇한 듯 씩 웃으며 이런 말을 내뱉었다.
“네 동생이 너보다 훨씬 낫던데? 더... 맛있었어.”
일곱째 날, 모든 게 마침내 끝나는 순간 고선호의 눈빛에는 차가운 빛이 스쳤다.
“백하임. 중병을 앓던 나를 버려두고 떠났을 때... 오늘을 상상이나 해봤어?”
3년 동안 변하지 않은 그 눈을 바라보는 순간, 기억 속 소년이 지금의 고선호와 겹쳤다.
백하임과 고선호는 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함께인 소꿉친구였다.
태어날 때부터 혼약이 정해져 있었고 모두가 두 사람이 장차 결혼할 거라고 믿었기에 그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열여덟 살, 벚꽃이 흩날리던 그날,
고선호는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있었다.
얼마 후, 꽃잎이 그의 눈가에 내려앉았을 때 그는 백하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하임아, 우리 졸업하면 바로 결혼하자.”
그런데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일들이 터져 나왔다.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고선호의 백혈병 진단.
골수 이식이 가능한 것으로 판정된 다음 날, 백하임은 망설임 없이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한평생 자존심을 굽히지 않던 고선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로 말했었다.
“난 골수 이식을 원하지 않아. 차라리 그냥 조용히 죽는 날을 기다릴게. 하임아,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 테니까 제발 가지 마. 만약... 네가 진짜 떠나면 난 널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백하임의 걸음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직전, 목까지 차오르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고선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번호를 눌렀다.
사실 백하임이 받기만 하면, 단 한마디만 해준다면, 그는 그녀를 용서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래서 고선호는 죽도록 백하임을 증오했다.
3년 뒤, 그는 서울에서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신흥 권력자가 되어 있었다.
수단은 잔혹했고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가장 증오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백하임이라는 것을.
백하임이 다시 서울에 나타난 날, 고선호는 그녀의 모든 생계 수단을 끊어버리고는 강제로 고씨 가문의 가정부로 만들었다.
하지만 오직 백하임만 알고 있는 사실, 그날 그녀가 떠난 이유는 1억이 넘는 치료비 때문이었다.
그날, 두 장의 서류가 그녀 앞에 펼쳐져 있었다.
왼쪽에는 골수 이식 동의서, 오른쪽에는 전장 의사를 투입 시 작성하는 생사 확인서.
왼쪽은 백하임이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주는 서류였고 오른쪽은 그녀가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서류였다.
여자의 붉어진 눈을 마주한 고선호의 목소리는 묘하게 기대가 섞여 있었다.
“후회돼?”
곧, 백하임은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그리고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후회하지. 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난 네가 쫓아내도 안 나갔을 거야. 혹시 우리 고 대표님은 아직 옛정을 못 잊은 건가? 날 얼마에 사려고 이래?”
그 말에 고선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역시. 백하임, 골수 이식 동의서... 이미 내가 갖고 있어.”
백하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미 가지고 있다고? 그렇다면 그때의 진실도 알고 있는 건가?’
고선호는 그녀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채, 한 장의 서류를 백하임 앞에 거칠게 내던졌다.
“그때 나에게 골수 이식을 해준 건 여진이야. 만약 여진이가 아니었으면 난 이미 죽었겠지.”
그는 분노로 인해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같은 피가 흐르는데 왜 너만 그렇게 냉철하고 잔인해? 아, 그리고 알아둬. 열흘 뒤에 나는 여진이랑 결혼할 거야.”
솔직히 백하임은 너무 씁쓸했다.
‘그래, 잊어서는 안 돼.’
그날 그녀가 서명했던 골수 기증 서류는 여동생인 백여진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만약 자신이 죽으면 세상에 동생을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고선호뿐이라고 생각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백하임은 아무 말도, 따져 묻지도 않았지만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참 아쉽게 됐네. 돈으로 날 사는 건 이제 못 하겠다. 그렇지? 두 사람, 오래오래 행복하길 바라.”
어차피 열흘 뒤면 떠날 예정이었고 죽지 않는 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