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질투나 욕이 아닌 축복의 말을 듣는 순간 고선호의 안색은 더 어두워졌다.
“너는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속이 시원해?”
“그럼 잘나신 고 대표님은 내가 지난 3년 동안 어떻게 먹고살았다고 생각하는데?”
고선호의 눈은 마치 핏줄이 터진 듯 새빨개졌다.
이내 그는 서랍에서 두툼한 돈뭉치를 꺼내더니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좋아. 너 돈 좋아하지? 이 돈 가져가서 침대 시트 직접 빨아.”
백하임은 바닥에 흩어진 돈을 주워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그때 이미 백여진은 깨어 있었다.
그녀는 시트에 남은 조그만 혈흔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수줍은 듯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다 인기척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언니, 난 선호를 사랑해.”
백하임은 심장이 잠시 멎는 것 같았고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백여진의 태연한 눈빛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동생인 백여진이 계속 말했다.
“사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알고 있었어. 선호가 언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언니는 선호가 가장 힘들 때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했지만 선호는 언니를 사랑했어. 언니를 찾으려고 창업했고 매일 접대하다 피를 토할 정도로 일했어. 게다가 투자자가 선호에게 약까지 먹이면서 여자를 들이밀었을 때는 5층에서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져도 다른 여자한테 손 하나 안 댔어. 그런데 언니가 돌아오자마자 선호가 미친 듯이 여자를 옆에 두더라고. 마치 언니를 자극하려는 듯이.”
백여진은 자신의 몸에 남은 붉은 자국들을 드러냈다.
“언니가 떠난 이유를 찾으려고 선호가 조사를 시작했거든. 다행히 언니가 내 이름으로 서류를 썼잖아? 어느 날 나한테 서류에 대해 물었고 난 그냥 인정했어. 봐, 이제 선호는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어.”
고선호가 남긴 흔적들이 백하임의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그들이 함께였을 때도 그는 이런 식으로 흔적 남기기를 좋아했다.
누군가 백하임의 목에 난 자국을 볼 때면 고선호의 눈은 늘 만족감으로 가득 찼었다.
고선호는 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네 몸에 흔적을 남겨야 세상 사람 다 알지. 넌 내 거라는 걸.”
그런데 지금, 그 흔적은 다른 사람의 몸에 있다.
“네가 사랑한다면... 좋은 거지. 아마 곧 널 아내로 맞을 거야.”
백하임의 말에 백여진은 벌떡 일어나더니 광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그걸로는 너무 부족하지! 왜... 왜 침대에서 아직도 언니 이름을 부르는데? 난 언니가 선호 마음에서 완전히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해!”
그 순간, 백여진은 백하임의 손을 잡더니 그녀의 손으로 자신을 세게 밀어버렸다.
이내 백여진의 머리는 그대로 침대맡에 부딪치며 큰 소리가 났다.
곧, 소리를 듣고 달려온 고선호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리더니 빠르게 피로 물든 침대에서 백여진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타오르는 분노를 못 참고 옆에 있던 백하임에게 고함을 질렀다.
“백하임, 넌 진짜 괴물이야! 이젠 네 친동생까지 해치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서둘러 백여진을 안고 나갔고 백하임 역시 억지로 병원으로 끌려갔다.
의사가 팔뚝 굵기의 주삿바늘을 들고 나타나자 백하임은 반사적으로 의수를 달고 있는 오른팔을 뒤로 숨겼다.
그러자 고선호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뭘 그렇게 숨겨? 사람을 이렇게 다치게 해놓고 책임질 생각은 없는 거야? 오늘 여진이가 흘린 피만큼 네가 다 갚아.”
백하임은 왼팔을 내밀어 의사에게 건넸다.
바늘이 팔에 꽂히는 순간, 그녀는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고 대표님, 내 피 비싼 거 알지? 팔면 최소 몇백만 원은 받을 텐데... 우리 대표님은 얼마나 주시려나?”
고선호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백하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목을 꽉 잡았고 힘이 점점 들어가 숨이 거의 끊어질 때쯤, 갑자기 손을 뗐다.
“그 피 버려요. 저렇게 차가운 피는 더러우니까. 여진이가 깨어날 때까지 멈추지 말고 계속 뽑으세요.”
백하임은 바닥에 주저앉아 목에서부터 올라오는 피비린내를 묵묵히 삼켰다.
이윽고 벽을 짚고 일어서려던 순간 눈앞이 새까매졌고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
얼마 후, 희미한 의식 속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자 상태가 너무 안 좋습니다. 영양실조, 저혈당이 합쳐져서 이런 대량 헌혈은 버틸 수 없어요. 게다가 이 사람은 골수 이식 이력도...”
의사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고선호가 끼어들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골수 이식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