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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윤태현이 내뱉은 말은 고작 한마디뿐이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칼날처럼 강유진의 가슴을 찌르고 들어와 속을 휘저었다. 이미 여기저기 헤진 마음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강유진은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웠다. 머릿속이 윙윙 울렸고 눈앞에는 공허함만 남았다. 언제부터였는지 홀 안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조명만 남아 강유진의 상처를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강유진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옆에 놓인, 누군가가 옆에 놓고 간 겉옷을 주워 몸을 감쌌다. 강유진은 옷자락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강유진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비를 맞으며 걸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세차게 때리고, 이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꼭 눈물처럼 흘렀지만 강유진은 더는 울지도 못했다. 눈물마저 말라 버린 기분이었다. 강유진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고 그저 거리 위를 목적 없이 헤맸다. 그때 차 한 대가 강유진 옆에 멈춰 섰다. 윤태현의 차가운 얼굴이 창문 너머로 드러났다. “타.” 강유진은 못 들은 척했다.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는 것도 모르고, 무겁게 다리를 끌며 앞으로 걸었다. 그러자 윤태현은 미간을 찌푸렸고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타라고.” 강유진은 그제야 발을 멈추고 윤태현을 바라봤다.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윤 대표님.” 강유진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는 그냥 비서잖아요.” 그 말이 떨어지자 윤태현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윤태현은 차에서 내려 빗속으로 걸어와 강유진 앞에 섰다. 그리고 강유진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오늘 일은... 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난 예전에 청아를 한 번 잃어본 적이 있어. 두 번 다시는 못 잃어.” 윤태현은 숨을 한번 고른 뒤 말을 이어 갔다. “네가 당한 모욕은 내가 전부 갚을 방법을 찾을게. 그러니까 이 일로 나한테 화내지 마.” 강유진은 이번에 물러서지 않았다. 강유진은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손목을 빼내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목소리는 마치 바닥에 가라앉은 물처럼 무덤덤했다. “대표님, 농담하지 마세요.” 강유진은 비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 대표님이랑 서청아 씨 같은 사람들한테 어떻게 화를 내요. 예전에는 제가 너무 순진했고, 너무 우스웠어요. 제 분수도 모르고, 제 자리가 어디인지도 모르고요.” 강유진은 한 박자도 쉬지 않고 이어 말했다. “이제부터는 제가 비서라는 것만 기억할게요. 대표님의 생활에 더는 끼어들지도 않을 거고, 방해도 안 할 거예요. 이제 만족하셨어요? 그러니까... 저를 그냥 보내 주세요.” 강유진이 그렇게 말할수록 윤태현의 얼굴은 더 굳어 갔다. 윤태현이 이를 악문 채 숨을 눌러 삼켰다. “유진아, 너도 알잖아. 내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윤태현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난 널 무시한 적 없어. 아까 그런 말들은 청아를 달래려고 한 말일 뿐이야. 나한테 너랑 이안이는...” 윤태현이 뒤에 무슨 말을 더 했는지 강유진은 듣지 못했다. 강유진은 눈앞이 점점 흐려졌고 눈꺼풀이 납처럼 무거워져 도저히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강유진은 몸에 남은 힘이 다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몸이 휘청하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강유진은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젖었던 옷은 이미 갈아입혀져 있었고 몸 곳곳의 상처는 소독과 붕대 처치가 끝나 있었다. 침대 옆에는 약과 따뜻한 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간호사가 링거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가 강유진이 깨어난 걸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깨어나셨어요? 어제 남자 친구분이 밤새 곁을 지키셨어요. 방금 나가셨어요.” 강유진은 마른 입술을 겨우 벌렸다. 갈리진 목소리로 가까스로 말했다. “남자 친구 아니에요.” 강유진은 잠깐 숨을 삼킨 뒤, 더 단호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남자 친구였던 적도 없어요.” 강유진과 윤태현 사이는 시작부터 사고였다. 윤태현이 인정한 건 단 하나, 비서라는 직함뿐이었다. 그 외에 어떤 관계도 윤태현이 그런 관계라고 인정한 적은 없었다. 그동안 강유진은 자신을 속였다. 언젠가 달라질 거라고, 언젠가 미래가 있을 거라고 믿어 버렸다. 하지만 이제 강유진은 그 착각부터 깨뜨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곳을 영원히 떠나고 싶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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