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그가 자신이 가져온 반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강청서는 사람들 속을 비집고 합자를 망루 옆에 있던 금란위에게 건넸다.
“대인, 이건 대군마마께서 끼는 반지입니다. 조 집사님께서 쇤네를 보내 전하라 하셨습니다.”
금란위가 확인을 마치고 합자를 건네받으려고 할 때 뒤에서 오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군, 좀 더 짜릿한 것을 즐겨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현익의 차가운 목소리도 들렸다.
“어떤 자극적인 것을 말인가?”
“전장에서 활로 적의 머리를 쏘다가 원형 과녁, 사각 과녁을 쏘려고 하니 재미가 없어서 말입니다. 차라리 이리하시는 것이…”
붉은 갑옷을 입은 윤세진이 손가락으로 강청서를 가리켰다.
“너 이쪽으로 오너라.”
순간, 모든 이의 시선이 강청서에게 집중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그녀는 마치 얼음 구덩이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옆으로 물러나자, 좁은 통로가 생겼다.
그때, 강청서는 손에 있던 나무 합자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는 눈부신 전공을 세워 백성들에게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윤세진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이 강청서의 이마를 가리키고 있던 윤세진의 잘생긴 얼굴에는 거침없는 패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윤세진의 오만한 눈빛 속에는 놀라움이 스쳤으나 그 놀라움은 이내 웃음으로 바뀌었다.
“이런 요염한 미인이 있었다니.”
그는 옆에 있던 측근들에게 지시했다.
“저 여인을 과녁 아래에 세우고 머리 위에 배 한 개를 올려놓거라. 나와 대군은 백 보 밖에서 배의 정중앙을 맞히되 배즙이 한 방울도 새지 않게 하는 시합을 하련다.”
그는 옆에 금은보화가 가득 담긴 구리 대야에서 비취 옥팔찌를 꺼내 강청서에게 던져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는 아군을 절대 해하지 않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이 팔찌는 네게 상으로 주는 것이다. 시합이 끝나고 나서 은자 백 냥을 더 주겠다.”
강청서는 풀숲에 떨어진 팔찌를 쳐다보기만 할 뿐 줍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천한 신분이란 것은 진작에 알았다만 이렇게까지 천대받을 줄이야.’
이윽고 차가움과 살기가 느껴지는 이현익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멍해서 뭘 하고 있는 것이오?”
그가 자신을 알아봤다는 것을 강청서는 알고 있었다.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시위병을 따라 표적 앞에 선 그녀는 주변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눈이 부신 태양을 올려다보았으나 태양의 뜨거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몸은 여전히 차갑게 느껴졌다.
…
구석에서 윤왕부의 세자와 이야기하고 있던 강희천이 과녁 아래에 있던 사람을 쳐다보았을 때 얼굴의 웃음과 핏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청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앞으로 다가가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누이동생을 확인한 순간, 평소의 냉정함과 차분함은 사라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막 뛰쳐나가려고 하자, 뒤에 있던 윤왕부의 세자가 황급히 잡아당겼다.
“강 형, 이 뭐 하는 짓인가? 저쪽은 모두 섭정왕의 세력들이오!”
세자는 진심 어린 충고를 이어갔다.
“자네가 교제를 좋아하지 않다 보니 이리 간만에 나와 어울리는구먼. 자네는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지만 학식과 재능이 뛰어나서 내 동생은 자네를 깊이 존경하고 있다네. 자네를 여기 데려온 것도 조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고. 우리 윤왕부는 대표적인 왕당파로서 섭정왕 세력들과는 적대관계이니 함부로 나서면 아니 되네.”
강희천은 윤왕부 세자의 손을 뿌리치며 여태 처음으로 타인 앞에서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섭정왕, 왕당파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피붙이인 누이동생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왕이나 재상이 된다 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사격장으로 달려갔다.
…
이현익은 천천히 반지를 착용한 후, 윤세진보다 한발 앞서 자신의 활을 들어 올렸다.
화살을 얹고, 시위를 당기고, 조준까지 하고 나자, 햇빛 아래에서 날카로운 화살촉이 차가운 빛을 반사했다.
백 보 밖에 있던 강청서가 등을 곧게 편 채 망루 위의 사내를 올려다보니 그는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의 목을 조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