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그렇게 마음을 정한 이현익은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바로 하인을 시켜 창고에 갓 들여온 등꽃 무늬 자기를 꺼내 오게 하고 병이며 찻잔이며 그릇이며 정갈히 상자에 담아 봉했다.
이어 자신의 명함을 곁들여 윤왕부로 전달하게 했다.
...
한 시진이 지난 후, 동춘루 천자각의 상석.
윤희준은 눈앞에 앉은 사내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곧게 앉은 자세, 손끝 하나 흐트러짐 없는 기세, 저절로 사람을 물러서게 만드는 냉철한 기운.
방금 전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현익은 그의 침묵에 약간의 불쾌함이 스치려는 찰나, 같은 말을 다시 한번 꺼냈다.
“윤 도령, 그대가 예전부터 이조 참판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 나도 익히 알고 있소. 이조는 관직 승차의 중심이라 그대들 진영에 쌓인 인재들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갇혀있지 않소.”
“허니 말하겠소. 그대가 나와 사사로이 뜻을 나누고 강씨 저택에 나를 벗이라 인도해 준다면 그대에게 이조에 자리를 하나 비워줄 수도 있소.”
“반각 시진. 그 안에 답을 들려주시오.”
윤희준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도 아니었다.
이현익의 말 하나하나 똑똑히 들었건만, 도무지 앞뒤가 맞질 않았다.
권세로 조정을 움켜쥔 이가 어찌 적이라 여기던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가.
이 커다란 떡 하나에 설마 독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허나 설령 독이라 한들,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현익이 말했듯 오늘날 조정의 권세는 나날이 그의 손으로 쏠려가고 그와 맞서는 파벌은 사면초가의 처지에 내몰려 있었다.
아랫사람들 중에도 재능 있는 이가 수두룩했으나 길은 막혔고 자리는 좁았다.
임금의 나이가 어리니 정사에 나설 날이 오려면 족히 십 년은 더 걸릴 터.
이 기세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과연 그날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곱씹을수록 이 기회는 놓치기 어려운 것이었다.
윤희준의 낯빛은 등잔 밑 그림자처럼 변덕스럽게 흐려졌다.
푸르스름하게 식었다가, 혈색이 돌았다가, 여러 차례 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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