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밤이 되었다.
흑목과 현석으로 지어진 궁궐은 밤이 되자 더욱 고요하고 쓸쓸한 기운에 잠겼다.
궁궐 내부의 장식과 조각은 박쥐나 새, 짐승 모양이 아니라 간단한 세로줄과 가로줄 무늬였다. 간소하면서도 엄숙한 모습은 마치 이 궁궐의 주인과 같았다.
술에 취한 후, 이현익은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창백하고 약해진 얼굴빛과 입술 색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하얀 호랑이 가죽을 이어 만든 푹신한 평상에 누워 한 손에 고운 글씨가 적힌 종이를 쥐고 있었다.
평소 차갑고 강인하던 눈빛에는 촛불처럼 따스한 온기가 어렸다.
‘묘수회춘'.
글씨는 글쓴이를 닮는다고 했던가. 그녀처럼 맑고 세속을 초월한 듯한 글씨였다.
강 씨 저택에서 묵었던 날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그는 정무를 보는 틈틈이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맑고 깨끗한 연꽃처럼 고운 여인이 술 향기와 은은한 여인의 향기를 풍기며 그의 품에 안겼고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는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대군...”
문을 열고 들어온 시위병이 그의 회상을 깨뜨렸다.
“급히 아뢸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이현익은 손에 들고 있던 서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정성스럽게 면포로 싸맨 후,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시위병은 공손하게 말했다.
“첫째는 궁에서 사람을 보내 대군과 김연희 아씨의 혼례 날짜가 정해졌으니, 절차를 서둘러 진행하라는 전갈입니다. 대군께서 직접 챙기시기 번거로우시면 종친부에서 대신 혼례를 주관할 것이며 납채, 연길, 납폐 등의 절차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합니다.”
이현익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
“솜털도 안 가신 녀석이 감히 나를 이용하려 하다니.”
“그 녀석이 순순히 내 말을 듣고 정사에만 전념한다면 그 녀석이 모든 권력을 손에 쥘 때까지 기다렸다가 깨끗하게 물러나 줄 터인데.”
“공부는 안 하고 딴짓만 하니... 얼마 전 윤 장군이 궁에 들어가 그 녀석에게 무예를 가르쳤다지? 실력은 얼마나 늘었느냐?”
시위병은 난처한 듯 말했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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