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김태하가 강소희를 붙잡아 두 사람의 몸이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았다.
남주는 정말 사각지대 없는 엄청난 미남이었다. 강렬한 호르몬 기운이 순식간에 그녀를 감싸안았다. 강소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몸이 안정되자 김태하가 물었다.
“걸을 수 있어?”
“오래 쭈그려 있었더니 다리가 좀 저려요. 잠깐이면 괜찮아져요.”
강소희는 다리의 저림이 가시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김태하는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다리가 저린 게 단지 쭈그려 있어서만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큼큼.”
갑자기 목이 건조했다. 그는 딴짓으로 마음을 돌려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고, 그의 갑작스러운 동작은 오히려 강소희를 놀라게 했다.
강소희는 비명을 지를 뻔해 재빨리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가 중간에 체력이 달려 자신을 떨어뜨릴까 봐 겁이 났다. 이 몸무게로 떨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내려줘요. 저 너무 무거워요!”
“괜찮아. 나 할 수 있어.”
김태하는 옷 입었을 때는 날씬해 보이지만 정작 벗으면 탄탄한 그런 몸이었다.
흑촌 마을에 온 몇 해 동안 매일 몸 쓰는 일을 하면서 팔에 근육도 잡혔다. 덕분에 100킬로 넘는 강소희를 안고도 얼굴 한번 붉히지 않았다.
강소희의 심장은 요동쳤다. 놀라서인지, 설레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책 속으로 들어오기 전 그녀는 모태 솔로였다. 이성에게 안겨 본 적도 당연히 없었다. 막장 드라마 속 재벌남이 여주를 번쩍 안아 올리는 장면을 항상 부러워하던 그녀였다.
지금 이렇게 미남에게 안겨 있으니 심장이 안 뛰면 그게 더 이상했다. 안타깝게도 이 몸의 주인은 대식가 뚱녀, 그림은 마치 미남과 야수였다.
처음에는 김태하가 힘이 모자랄까 봐 걱정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한 걸음 한 걸음 흔들림이 없었다. 불안은 점점 단단한 안정감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살짝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훗날 그가 여주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의 남자였다. 강소희는 이 따뜻함을 즐기기로 했다.
그의 목을 감은 두 손은 무의식중에 자리를 옮겼다. 목선을 따라 내려가 그의 가슴을 더듬고, 더 아래로는 복근을 훑었다.
김태하는 자신의 가슴 위에서 허우적대는 통통한 손을 내려다보며 숨이 조금 가빠졌다. 그는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대낮에 대체 뭘 만지는 거야!’
“죄, 죄송해요!”
강소희는 급히 사과하고 얌전히 손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자신이 미색을 탐했다고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긴장해서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허미경은 남편에게 입짓으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
“봤지? 우리 사위도 사람 따뜻하게 챙길 줄 아네.”
허미경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젯밤에 더 일찍 흥을 돋울 술을 먹였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강준호는 곰방대를 두드리며 아내만큼 낙관적이지 못했다. 김태하의 사람됨은 흠잡을 데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 약을 쓴 건 자기들이 잘못했다.
김태하에게는 분명 불만이 있을 것이다. 남자는 체면을 중히 여긴다. 지금 딸을 안고 있는 것도 일부러 보여 주는 연기일지 몰랐다. 어쨌든 지금 김씨 가문은 흑촌 마을 강씨 가문의 집에 머물고 있으니 말이다.
‘경운시에 가서 가을걷이 끝난 뒤에야 본심을 드러내려는 걸까?’
강준호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만약 그렇다면 딸이 경운시에 가면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었다. 그들도 곁에 없는데 김씨 가문 사람들이 어떻게 딸을 대할지 누가 아나?
“그랬으면 좋겠구나.”
강준호의 말투는 심드렁했다. 그 반응이 허미경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영감탱이 딸과 사위가 드디어 일을 치렀는데 얼굴은 축 처져서는 흥만 깨네.’
허미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둘을 봐. 딱 부부상 아니야?”
이번에는 강준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 여편네 눈이 나빠진 건가?’
딸을 편드는 마음이야 아버지가 더하겠지만, 강소희와 김태하를 나란히 세워 놓으면 차마 둘이 어울린다고는 못 하겠다.
“헛소리 좀 그만하고 소희한테 말해. 사위랑 빨리 애부터 가져야지. 지금은 그게 급선무야.”
아이만 생기면 둘의 끈이 생기고 혼인도 더 안정된다.
요즘 어느 마을에 바람피우는 일이 없겠나. 더구나 김씨 가문이 가는 곳은 수도였다. 예쁜 아가씨는 널리고 널렸다.
강준호는 김태하의 인품을 믿었다. 다른 여자와 함부로 얽힐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밖에서 부끄럼 모르는 여자들이 들이대면 어쩌랴.
게다가 강소희의 외모는... 웬만한 여자와 맞붙으면 줄줄이 패배였다. 한두 번의 유혹쯤은 버티겠지. 하지만 계속된다면 김태하가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이 얘기가 나오자 허미경이 멈칫했다.
“소희가 저렇게 살이 많이 쪘는데 정말 임신이라도 하면 나중에 해산할 때 위험하지 않겠어?”
강준호는 말을 잃었다. 또 다른 근심거리가 생겼다.
부모가 된 그 순간부터 자식 걱정은 평생의 숙명이었다.
“그만하자. 애 가지라는 말은 소희한테 하지 마. 대신 마음은 단단히 먹으라고 하고, 나이만 차면 사위랑 가서 혼인신고 하게 하자.”
한참 만에 강준호가 이렇게 정리했다.
김태하는 강소희를 방 안에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몇 마디 일러두었다.
“오늘은 푹 쉬어. 집안일은 내가 할게.”
말을 마치자 그녀가 답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갔다. 누군가가 뒤에서 쫓는 듯이 발걸음이 급했다.
강소희는 황급히 달아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부끄럼 타는 건가?’
부끄러워해 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매번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약 먹이고 침대에 올라탄 비열한 여자로만 기억되는 건 정말 곤란하니까.
열린 창문 틈으로 그녀는 마당의 그를 바라보았다. 김태하는 마당에 쭈그려 침대보를 빨고 있었다.
남주는 참 좋은 남자였다. 이불 빨래까지 자청하다니 말이다. 이 시대에 집안일을 좋아하는 남자는 드물었다.
마당에서 빨래하는 사위를 바라보던 강준호의 얼굴에도 마침내 웃음이 번졌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네.’
김씨 가문은 이미 다시 일어섰다. 김태하가 그들 앞에서 일부러 쇼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빨래 중인 김태하는 몰랐다. 그저 단순한 행동 하나가 장인에게 별별 해석을 낳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는 계속 빨래를 하다가 문득 손이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