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안재희의 소란에 진서우 역시 맞장구를 쳐댔다.
그녀는 마치 약하고 순결한 백합처럼 울먹이며,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억울함을 겪은 듯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태도는 안신혜와 송하영이 마치 죄인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이때, 옆에 있던 누군가 입을 열었다.
“방금 누가 책임자와 송승현 감독을 모시러 갔어요.”
이 말을 들은 안재희는 더욱 자신감에 겨워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안신혜를 노려보며 말했다.
“노블 그룹은 네가 함부로 날뛸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안신혜, 두고 봐! 송 감독님이랑 제작사가 이 일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안신혜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확실해?”
안재희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안신혜를 훑어보며 말했다.
“송 감독님은 평범한 감독이 아니야. 네가 외국에서는 부적절한 관계로 상과 역할을 따냈겠지만 여기서는 그런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아.”
이 점에 대해 안재희는 매우 확신했다.
송승현이 괴짜 감독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능력이 뛰어나서만이 아니라 괴팍하고 까다로운 성격으로도 연예계에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누구의 체면도 봐주지 않았다.
투자자를 데리고 오는 배우나 투자자라도 송승현은 특별 대우를 해준 적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천궁]의 여주인공이 내정되지 않고 오디션을 통해 뽑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안재희는 방금 안신혜의 처사는 무조건 송승현의 화를 유발할 것이고, 따라서 안신혜는 오디션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안재희는 진서우를 걱정하는 척 연기를 하며 말했다.
“서우야, 안심해. 송 감독님이 반드시 네 억울함을 풀어줄 거야.”
곧 있으면 안신혜가 개처럼 오디션장에서 쫓겨날 거라고 상상하자, 안재희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찼고 눈빛은 통쾌함과 악의적인 기쁨으로 반짝였다.
이때, 오디션장 안쪽 통로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캐스팅 담당자와 매우 젊은 남성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젊은 남성은 감독 작업복 조끼를 입고 있었고,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에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 있어 다소 낙천적이면서도 예술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안재희는 그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말했다.
“송 감독님, 권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안신혜가 방금 주제넘게 노블 엔터테인먼트에서 난동을 부렸어요. 제작진과 감독님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더라고요.”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리던 진서우는 울먹이며 말했다.
“흑, 아무리 대선배라지만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 건 아니죠.”
캐스팅 담당자는 엄숙한 표정을 지은 채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안재희는 급히 방금 일어난 일과 함께 이야기를 부풀어 말했다.
“송 감독님, 안신혜처럼 품행에 문제가 있는 연예인이 어떻게 [천궁]에 출현할 자격이 있겠어요? 오디션도 볼 필요 없이 제명해야 해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송승현은 볼이 부어있는 진서우를 힐끗 쳐다보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옆에 담담하게 서 있는 안신혜를 바라보았다.
이제 승산이 있을 거라는 확신에 흥분한 안재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송승현에게 들켜 곤경에 빠진 안신혜의 꼴을 보기를 간절히 바랐다.
송승현은 검은 뿔테안경을 집어 올리며 곧장 안신혜 쪽으로 걸어갔고, 안신혜는 담담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상황의 전개를 지켜보았다.
송승현의 성격대로라면 안신혜는 결국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할 것 같았다.
마침내 안신혜 앞에 다가간 송승현의 잘생긴 얼굴에는 공손하면서도 존경의 표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하더니 반짝이는 눈빛으로 안신혜를 바라보며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안신혜 씨, 드디어 오셨군요. 제때 마중 나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번에 저의 영화에 출연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모실 수 있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안신혜는 눈꼬리를 접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송 감독님, 너무 겸손하시네요.”
“헉!”
주변에서 아까보다 더 큰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상 밖의 상황에 모든 사람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멍하니 서 있었다.
연예계에서 가장 고집이 세고 오만하며 눈이 높기로 소문난 송승현이 안신혜에게 이토록 공손하고 존경이 어린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는 건 너무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송승현의 말을 들어보면, [천궁]의 여주인공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고 안신혜를 위해 비워두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은 안신혜와 송승현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지만, 그 누구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던 진서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안신혜를 노려보았다.
안재희의 흡족하고 통쾌한 표정도 그대로 얼어붙은 채 굳어 있었다.
송하영은 손목시계를 힐끗 들여다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송승현을 향해 말했다.
“빨리 나왔네. 방금 전화했을 때까지만 해도 좀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송승현도 웃으며 다급히 말했다.
“내가 어떻게 감히 안신혜 씨를 오래 기다리게 하겠어. 안신혜 씨, 우리 먼저 뒤에 있는 대본 회의실로 가시죠. 상의하고 싶은 게 많아요.”
안신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송승현과 함께 떠나려는 찰나,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모두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안신혜가 고개를 돌리자, 안색이 창백해진 안재희가 보였다.
안재희는 뺨을 맞은 진서우를 자신의 옆으로 잡아끌며 당당하게 따졌다.
“지금 안신혜가 사람을 때린 일은 그냥 이렇게 넘어가는 거예요?”
정신을 차린 진서우는 이내 눈물연기를 선보였다.
송승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귀찮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고는 송하영을 향해 퉁명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송하영이 별거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때린 거야. 정당방위.”
송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재희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들었죠? 정당방위라니까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안재희는 급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날카롭게 말했다.
“송 감독님, 이렇게 편파적으로 일을 처리하시다 나중에 언론에 알려져도 괜찮으시겠어요?”
안재희의 말에 송승현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겁니까? 불만이 있으면 지금 당장 오디션장에서 나가세요. 붙잡고 싶은 생각 전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