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안신혜는 5년 전 안재희가 그녀에게 가한 잔인한 행동과 뼛속까지 파고들었던 고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그려졌고 지금도 매일이다시피 악몽을 꾸곤 했다.
임신 8개월의 배를 안고 피범벅이 된 바닥에서 애절하게 울부짖으며 도움을 청했던 자기 모습과 잃어버린 아이, 그리고 그런 자신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웃고 있던 안재희의 얼굴까지.
이 모든 과거는 마치 날카로운 칼처럼 안신혜의 심장을 찔러댔다.
안재희를 깊게 증오하는 만큼 지금은 그 모든 분노가 강준혁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권도준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이상한 건 강씨 가문 둘째 도련님께서 직접 나서서 안재희에게 자원을 넘겨줬다는 거예요. 둘 사이에 무슨 특별한 관계라도 있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강준혁은 이미 약혼한 상태라고 들었거든요. 약혼녀도 명문가 집안 여자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강준혁이 안재희를 마음에 품고 그랬다는 건 아닐 텐데 말이죠. 정말 이해가 안 가네요.”
안신혜의 얼굴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녀의 원수인 안재희를 도와줬을 뿐만 아니라 약혼자까지 있는 남자가 어젯밤 자신을 끌어안고 키스까지 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안신혜는 냉소를 지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죽어도 강준혁을 집에 들이는 일은 없었을 텐데.
송하영이 전화를 끊고 진지한 표정으로 안신혜에게 말했다.
“신혜야, 권 대표가 직접 전화한 걸 보면 아마 송승현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정말 강씨 가문 사람이 나선 거라면, 우리가 [천궁] 여주인공을 따내기는 힘들 것 같아. 어쩌면 이대로 안재희에게 넘겨줘야 할지도 모르겠어.”
안신혜는 분노가 치밀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송하영이 말을 이었다.
“아까 오후에 안재희가 너를 모욕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속이 터질 거 같아. 하지만 신혜야, 너무 상심하지 마. 이 작품이 안 되면 다른 작품을 고르면 돼. 송승현도 말했잖아. 강씨 가문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싫었던 안신혜는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말했다.
“상심한 거 아니야. 일단 아파트로 데려다줘.”
안신혜가 안선 정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그녀는 안재희와 강준혁의 관계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이번에 귀국한 목적은 단순히 안재희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일궈놓은 안성 그룹을 되찾는 것 또한 그녀의 목표였다.
강준혁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안신혜는 자신의 계획에 강씨 가문 세력까지 포함해서 고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재희 하나를 상대하는 건 쉬웠지만, 강씨 가문의 강준혁까지 상대하려면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아파트 문 앞에 다다랐다.
문을 열려는 순간, 안쪽에서 들려오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에 안신혜는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왜 집에 사람들이 있는 거야? 강준혁과 강아름이 떠나면서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아 낯선 사람이 들어온 건가?’
안신혜가 경계심을 품고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천천히 문을 열자, 거실에서 따뜻한 빛이 흘러나왔다.
TV에서는 애니메이션이 재생 중이었고, 분홍색 앞치마를 입은 강아름이 두 손에 크림과 밀가루를 묻힌 채 짧은 다리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강아름의 뒤에는 양진성이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늑대로 가장해 아이를 쫓는 척하고 있었고, 까르르 웃으며 달리는 어린아이의 달콤한 웃음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주방에는 두 명의 도우미가 저녁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리고 발코니 원도우 앞의 싱글 소파에는 회색 홈웨어를 입은 키 큰 남자가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낯선 집안 광경에 안신혜는 순간 자신이 집을 잘못 들어온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이게 정말 내 집 맞아?’
그녀를 더욱 화나게 한 건 오늘 막 들여다 놓은 것 같은 구석에 놓인 두 개의 여행 가방이었다.
문을 닫고 들어선 안신혜는 차갑고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죠?”
안신혜의 말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이모 왔어요!”
고개를 돌려 안신혜를 발견한 강아름의 눈빛은 별이 박힌 것처럼 반짝였다.
아이는 양진성의 손에서 벗어나 짧은 다리로 안신혜를 향해 달려왔다.
“아름이가 이모를 위해 슈크림 빵을 만들고 있었어요! 엄청 달콤하고 맛있을 거예요.”
어린아이는 안신혜의 앞에 서서 크림으로 뒤덮인 두 손을 내보이며 발돋움을 한 채 칭찬을 기대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강아름한테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던 안신혜는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분노를 삭였다.
아이의 분홍색 앞치마에 묻은 크림을 발견한 안신혜는 귀여운 마음에 한껏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아름이는 슈크림 빵도 만들 줄 아는구나. 너무 대단하네!”
칭찬을 들은 강아름은 금세 얼굴이 발그스름해져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자신이 만든 슈크림 빵을 안신혜에게 주려는 듯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갔다.
강아름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안신혜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강준혁을 노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침에 분명히 제 집에서 나가라고 말했잖아요.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죠?”
안신혜는 강준혁이 안재희를 도운 일로 이미 마음속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던 참이었다.
그런데 자기 집에서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짐까지 들여다 놓은 채 심지어 강씨 가문에서 일하던 도우미까지 데리고 들어온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안신혜의 감정 변화와 적의를 감지한 강준혁은 천천히 무릎 위의 문서를 접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너랑 상의한다는 게 깜빡했어. 아름이가 너랑 더 지내고 싶다면서 이사 오자고 조르는데 어쩔 수가 없잖아.”
주방을 힐끔 보며 강아름의 위치를 확인한 안신혜는 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며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저한테 물어보고 동의를 거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미리 물어보지도 않고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제 집이 무슨 찜질방인 줄 아세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옆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양진성이 강준혁을 위해 변론했다.
“안신혜 씨, 지금 아가씨와 대표님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대표님께서 그만한 사례는 해주실 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양진성의 말에 어이가 없었던 안신혜는 냉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래요? 어떤 사례를 해줄 생각인 건데요?”
안재희를 도와 노블 엔터테인먼트에 압력을 행사해 [천궁]의 여주인공 자리까지 빼앗아 간 남자가, 이제 와서 사례를 하겠다는 말에 안신혜는 한심한 마음이 들었다.
비아냥거리는 그녀의 말투를 알아차리지 못한 양진성은 안신혜가 조건을 내세우는 걸로 오해하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안신혜 씨, 이건 대표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수표입니다. 며칠, 이 집에 묵게 해주시는 보상이니 받아주시죠.”
안신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봉투를 쳐다보다가 다시 태연하게 앉아 있는 강준혁을 바라보았다.
황당한 상황에 안신혜는 더 이상 분노를 감추지 못한 채 차가운 웃음과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강씨 가문은 역시 소문대로 돈이 많네요. 그렇다고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딴 수표 집어넣으시고 지금 당장 제 집에서 꺼져요!”
안신혜의 눈빛에선 차가운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녀한테 안재희 편에 선 사람들을 상대로 따뜻한 정 따위 있을 리 없었다.
안신혜의 말에 당황한 양진성이 소리를 높였다.
“안신혜 씨!”
‘이 여자 어디가 잘못된 거 아니야? 감히 지금 대표님 앞에서 저런 말투로 소리를 질러? 죽고 싶은 건가?’
“이... 이모?”
이때, 강아름이 한 손에 슈크림 빵을 들고 주방 입구에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멍하니 안신혜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