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차유나는 감정을 감쪽같이 숨기고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 아름을 찾았어요? 어디 다친 데는 없죠?”
강찬호는 그녀를 돌아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응, 무사히 돌아왔단다. 지금은 곤히 자고 있어.”
차유나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변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강찬호가 말했다.
“밖이 추우니까 어서 아이 안고 들어가서 계속 재워 주렴.”
차유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뻗어 강아름을 안으려 했다.
“비켜.”
싸늘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지자 차유나의 몸이 움찔했다.
이내 길고 단단한 팔이 불쑥 나타나 그대로 아이를 안아 올렸다.
차유나의 손이 허공에 덩그러니 멈췄고, 얼굴에 걸린 미소도 굳어졌다.
“준혁 씨...?”
강준혁은 딸을 조심스럽게 안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차유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억울하고 슬픈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했다.
강찬호는 펄쩍 뛰면서 손에 든 지팡이로 강준혁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버럭 외쳤다.
“이 자식이! 네 약혼자한테 태도가 그게 뭐니?”
차유나는 급히 강찬호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 냈다.
“할아버지, 전 괜찮아요. 아마도 아름이가 너무 걱정되어서 기분이 안 좋은가 봐요.”
강찬호는 욕설을 마구 퍼붓고 나서야 주름진 손으로 차유나의 손등을 토닥였다.
“유나야, 그동안 참고 살아줘서 고맙다.”
차유나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아니에요.”
강찬호는 온순하고 사려 깊은 차유나의 모습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내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준혁이가 진작 널 아내로 맞이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오냐오냐한 것 같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네 할아버지께 큰 신세를 진 데다가 너는 또 차씨 가문의 외동딸 아니겠니. 우리 집안에서 홀대받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다음 달쯤 네 할아버지랑 상의해서 결혼 준비를 시작하려 한다.”
차유나의 눈이 반짝 빛났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비록 지금은 강준혁의 약혼녀 신분이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상일 뿐이었다.
강준혁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인정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결혼식만 치르면 당당히 강씨 가문 며느리 자리를 꿰찰 수 있다.
이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강준혁이라는 남자 역시 온전히 그녀의 사람이 될 것이다.
차유나는 문득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준혁 씨가 원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야 준혁 씨를 좋아하지만 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긴 싫어요.”
강찬호의 말투가 단호했다.
“흥, 그놈이 곤란할 게 뭐 있어? 너희 혼사는 나랑 네 할아버지가 함께 결정한 일이야. 준혁한테 거절할 권리는 없다!”
...
강준혁은 강아름을 안고 의료 장비와 소독약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는 침실로 들어섰다.
잠든 딸을 내려다보며 그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표정이 살짝 굳었다.
옆에 있던 양진성이 즉시 의료진을 불러 강아름의 상태를 확인하게 했다.
조용한 방 안에는 각종 의료 장비들이 삑삑거리며 작동하고 있었고, 심전도 그래프는 불규칙하게 오르내렸다.
곧이어 중년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청진기를 내려놓았다.
양진성이 초조하게 물었다.
“선생님, 아가씨 상태는 어떤가요? 오늘 다친 데는 없죠? 병세는 괜찮나요?”
진 의사는 조심스레 강준혁 앞으로 다가가 진지하게 말했다.
“대표님, 아름 양의 상태가 썩 좋지 않습니다.”
강준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압도적인 기운이 마치 쓰나미처럼 밀려와 진 의사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강준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세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진 의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발작하면 안 됩니다. 지금 같은 상태에서 몇 차례 반복되면 만 18세 이후에 예정되어 있던 수술을 앞당겨야 할 지도 몰라요. 아직 나이가 어려서 무리하게 진행할 경우 리스크가 높아지고 성공 확률도 매우 낮아요. 현재로서 아름 양이 항상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 최선이에요. 가능한 모든 것을 맞춰주고 감정의 큰 기복 없이 평온하게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다시 울게 하지 마세요.”
양진성은 고개를 돌려 안쓰러운 표정으로 사랑스러운 아이를 바라보았고, 어느덧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늘은 참 무심하지.
이렇게 어리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에게 어찌 이런 병이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강준혁의 목젖이 꿀렁거렸다. 이내 모델 같은 몸을 살짝 숙여 손바닥으로 딸의 통통한 볼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순간,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5년 전 그 여자의 목숨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미숙아로 태어나 몸이 약했던 강아름을 살려낸 것도 당시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진이 해성에 총집결해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되살려낸 결과였다.
따라서 두 번 다시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기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
한편, 아래층.
양진성에게서 강아름의 병세에 대해 전해 들은 강찬호는 표정이 사뭇 어두웠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얼굴에 그새 주름이 더 늘어난 듯했다.
차유나도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훔치는 척했다.
그때, 강준혁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여유로운 걸음걸이는 품위가 넘쳤고 표정은 늘 그렇듯 무심했다.
차유나가 고개를 들었다. 선이 굵고 남자다운 얼굴에 시선이 향하자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강찬호는 한숨을 내쉬며 다가오는 강준혁에게 말했다.
“준혁아, 방금 진성한테서 아름의 컨디션에 대해 전해 들었어. 내일부터 김 아주머니에게 특별히 신경 써 달라고 할 거야.”
강준혁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
“아니에요. 내일 아침에 같이 우경 정원에 돌아갈 거예요.”
“뭐라고? 내 새끼를 데려간다니?”
강찬호는 깜짝 놀라더니 펄쩍 뛰었다.
“뭐 하는 짓이야? 다시는 아름을 보지 말라는 거니?”
강준혁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당연히 볼 수 있죠. 다만, 할아버지가 우경 정원에 오셔야 합니다.”
강찬호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안 돼! 이대로 내 사랑스러운 증손녀를 보낼 수 없어. 꿈도 꾸지 마.”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차유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했다.
“준혁 씨, 할아버지께서 아름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잖아. 갑자기 왜 데리고 간다는 거야? 할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어.”
강준혁은 딸이 본가에 머물고 있기에 마지못해 남은 거였다.
비록 어디서 굴러들어온 지도 모를 사생아가 끔찍하게 싫었지만 매일 그를 보기 위해서라도 강아름을 어떻게든 이 집에 붙잡아 둬야 했다.
강준혁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차유나의 얼굴에 고정되었고 마치 물건이라도 바라보는 듯 무미건조했다.
차유나는 섬뜩한 눈빛에 겁을 먹고 말을 더듬었다.
“준혁 씨, 왜, 왜 그래?”
강준혁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싸늘한 목소리에 살기가 서려 있었다.
“네가 뭔데? 그 입 닥쳐. 오늘 아름이가 몰래 나간 이유 내가 모를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