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차유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내 불안한 마음에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준혁 씨, 그게 무슨 말이야? 아름은 진성 씨랑 나갔다가 우연히 길을 잃은 거라고.”
강준혁이 냉소를 흘렸다.
“그래? 오늘 아름이 앞에서 내가 그 애를 원하지 않는다고,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말도 한 적이 없다는 거야? 차유나, 간덩이가 부었어? 감히 누구한테 그런 수작을 부려?”
마지막 한마디엔 분노가 서려 있었고, 마치 사형을 선고하는 듯싶었다.
옆에 서 있던 양진성은 지시가 내려지기만을 기다렸다.
강준혁이 말만 하면 당장이라도 강아름을 괴롭힌 여자를 끌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겁에 질린 차유나는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아니야. 준혁 씨,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아름을 예뻐해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 할아버지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실 거야.”
이내 억울한 표정으로 강찬호를 향해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강찬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버럭 외쳤다.
“그만해.”
표정은 불만이 가득했고 강준혁을 노려보며 호통쳤다.
“이 자식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유나가 얼마나 착하고 속 깊은 아이인데, 그동안 아름을 자기 자식처럼 아끼며 너 하나 믿고 열과 성의를 다했단 말이야. 또 그딴 식으로 얘기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차유나는 재빨리 눈물을 짜내며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 준혁 씨가 저한테 화내는 것도 이해돼요. 오늘 신경을 조금만 더 썼더라면 아름이가 밖으로 뛰쳐나가는 일도 없었을 텐데... 다 제 잘못이에요.”
강찬호는 다급히 그녀를 위로했다.
“그게 왜 네 탓이야? 아름은 원래 말썽꾸러기잖니. 유나야, 너무 자책하지 마.”
강준혁은 맹목적으로 차유나의 편부터 들어주는 강찬호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조소를 머금었다.
“이제 할아버지도 노망드셨군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강찬호는 깜짝 놀랐다. 곧이어 손주의 버릇없는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강준혁을 손가락질하며 핏대를 세웠다.
“건방진 녀석! 감히 할아버지 앞에서 그딴 소리를 해? 못된 놈! 내가 우습게 보이니?”
그리고 앞에 놓인 찻잔을 움켜쥐고 힘껏 내던졌다.
쨍그랑!
도자기 찻잔이 강준혁의 발치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고,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이때, 계단 위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증조할아버지, 뭐 하고 계시는 거예요?”
분홍색 잠옷을 입은 강아름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나타나자 거실의 살벌하던 분위기가 금세 수그러졌다.
강찬호는 보물 같은 증손녀를 보며 분노를 꾹 눌러 담은 채 얼른 손짓했다.
“아름이 일어났어? 어서 증조할아버지한테 와.”
강아름은 짧은 다리로 총총 걸어갔다.
하지만 강찬호 옆에 서 있는 차유나를 발견하더니 입을 삐쭉 내밀었다. 이내 고개를 홱 돌리고 강준혁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강찬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강준혁이 허리를 굽혀 아이를 안아 올렸다. 아까만 해도 살벌하던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왜 안 자고 나왔어?”
강아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랑 증조할아버지가 너무 시끄러워서요.”
강준혁은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이 없는지 확인하곤 슈트 자락을 벌려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차유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앞으로 아름이 근처에 얼씬거리기만 해도 너는 물론 네 가족마저 감쪽같이 사라지게 해줄 테니까.”
딸 앞이라 날카로웠던 기세가 한층 누그러졌지만, 그 한마디만으로도 차유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강준혁은 다시 강찬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굳이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필요 없겠네요. 이만 우경 정원으로 가볼게요.”
강찬호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안 돼! 아름은 두고 가.”
그러나 강준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딸을 안은 채 곧장 현관으로 걸어갔다.
강찬호는 화가 나서 뒷목을 부여잡았다. 이내 별장을 지키던 경호원들을 불렀다.
“여봐라! 당장 저 자식 막아.”
순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지만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강준혁은 태연한 얼굴로 검은 롤스로이스에 올라 유유히 본가를 떠났다.
강찬호는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분을 못 이겨 주변의 물건을 마구 집어 던지며 화를 삭였다.
잠시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부여잡고 겨우 계단을 올라갔다.
엉망진창이 된 거실에 차유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얌전하고 착해 보이던 아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쓸모없는 늙은이 같으니라고. 자기 손자 하나 못 잡아두고, 진짜 한심해.”
...
차 안.
강아름은 강준혁의 품에 안겨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아빠, 우리 집에 가는 거예요?”
강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강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아름은 집에 가기 싫어요.”
“왜? 아직도 아빠한테 화났어?”
아이는 작은 손으로 빳빳한 셔츠를 꼭 붙잡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이모 집에 가고 싶어요.”
강준혁이 멈칫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건 화사하고 요염한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결코 ‘요조숙녀’가 아니었다. 양진성이 조사해온 내용만 봐도 연예계 이력이 충분히 의심스럽고 지저분했다.
행여나 나쁜 영향이라도 줄까 봐 그런 사람을 굳이 딸아이의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안신혜’라는 이름으로 접근하다니.
이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딱 잘라 거절했다.
“안 돼.”
강아름은 볼을 부풀리더니 목소리 톤이 금세 높아졌다.
“아름은 이모가 보고 싶단 말이에요!”
강준혁이 눈썹을 까딱했다.
“그 여자랑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어. 이제 2시간 지났는데 벌써 보고 싶다고?”
도대체 뭐가 그리 좋은 거지?
강아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당하게 말했다.
“네!”
강준혁이 물었다.
“왜?”
아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모 품이 너무 따뜻했어요. 게다가 얼굴도 예쁘고, 엄청 좋은 향기가 났어요.”
강준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런 이유로는 안 돼. 아빠랑 집에 가자.”
끝내 허락하지 않는 탓에 강아름은 고개를 홱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굳게 닫았다.
작고 여린 등은 꼿꼿이 펴져 있었고, 누가 봐도 화난 모습이었다.
강준혁이 손가락으로 딸의 머리를 콕콕 찔렀다.
“아름이 착하지?”
강아름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계속 차 밖을 응시했다.
잠시 후, 강준혁은 한숨을 쉬며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이내 눈살을 찌푸렸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곧이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양진성, 차 돌려.”
...
안신혜는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그때, 현관문에서 다시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의아한 마음으로 다가가 문을 열자 존재감부터 압도적인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선이 굵고 짙은 눈매가 돋보이는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안신혜는 어리둥절했다.
“왜 또 오신 거예요?”
시종일관 무심하던 강준혁의 표정이 그녀를 보는 순간 미묘하게 변했다.
이 여자, 역시 수상하다.
‘안신혜’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접근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옷까지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다니?
이번에는 대놓고 그를 유혹할 작정인 듯했다.
방금 샤워를 마친 안신혜는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어깨에 늘어뜨렸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태생적으로 풍기는 요염함이 느껴졌다.
연보라색 실크 잠옷은 은은한 빛이 감돌았고, 말도 안 되게 잘록한 허리와 도자기처럼 희고 곧은 다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강준혁의 눈빛이 점점 짙어졌다. 억눌린 감정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검은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만약 이 여자가 정말로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해서 유혹하려는 생각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줄 수 있다.
단지 잠옷 하나만으로도 이미 목적을 이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