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남자의 복잡 미묘한 눈빛에 안신혜가 의문을 품고 있을 때 가슴 쪽 검은 양복이 꿈틀거리더니 작은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인형처럼 사랑스러운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앙증맞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모!”
그리고 강준혁의 품 안에서 팔을 활짝 벌리며 안신혜에게 안기려는 자세를 취했다.
“아름아!”
깜짝 놀란 안신혜는 금세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내 망설임 없이 강아름을 안아 들었다.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그녀의 손이 실수로 넓고 탄탄한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강준혁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코끝을 맴도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은은한 향기는 꿈속에서 수없이 맡았던 것과 동일했다.
샴푸나 향수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토록 쉽게 그의 마음 깊숙한 곳, 가장 은밀한 감정을 자극할 줄이야.
곰곰이 분석하려는 찰나 안신혜는 이미 강아름을 안고 거실로 향했다.
“아름아, 왜 다시 왔어?”
아이의 코끝을 톡 건드리자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준혁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보겠다고 떼를 써서 집에 안 가려고 버티더라고. 하룻밤만 묵고 가도 괜찮을까?”
안신혜는 웃으며 강아름의 볼에 입을 맞췄다.
“물론이죠.”
낯선 아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인내와 애정이 생겼다.
강아름과 함께 있으면 마치 자기 자식을 돌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공허하던 마음도 어느덧 충만해진 느낌이었다.
강준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행이군.”
그리고 긴 다리를 움직여 현관에 서서 자연스럽게 문도 닫았다.
손에 든 양복은 거실 소파에 툭 걸쳐 놓았고, 뼈마디가 선명한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여유로운 모습은 마치 자기 집에 막 들어온 사람 같았다.
안신혜는 어안이 벙벙했다.
뭐지?
강아름이 하룻밤 머무는 건 괜찮지만 강준혁까지 자고 가라고 한 적은 없었다.
이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밤 자고 가시게요?”
강준혁이 그녀를 흘깃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야심한 밤에 위험천만한 기운을 풍기는 낯선 남자를 자기 집에 재우는 자체가 말이 안 되었다.
안신혜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넌지시 떠보았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괜히 소문 나면 저한테 영향 있지 않겠어요?”
강준혁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영향이라...
정말 몰라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밀당이라도 하려는 심산인가?
귀국하자마자 차주한 같은 놈과 엮인 여자가 이제 와서 명예를 따진다고?
강준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평가하듯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약간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당신한테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단지 아름을 혼자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럴 뿐.”
말을 마치고 빳빳한 셔츠의 단추를 풀어 헤치고 거침없이 소파로 가서 앉았다.
길게 뻗은 다리를 포개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등을 기대 마치 오늘 밤 이곳에서 자고 가겠다고 선언하는 듯했다.
안신혜는 은근히 무시하는 남자의 눈빛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거만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아까 괜히 문을 열어줬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때, 작고 말랑한 손이 안신혜의 긴 머리카락을 쥐었다.
강아름이 신이 나서 외쳤다.
“저 이모랑 자고 싶어요.”
그제야 정신이 든 안신혜는 품에 안긴 귀여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불쾌했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강아름을 생각해서라도 남자는 무시하기로 했다.
“그럼 알아서 하세요.”
이내 몰래 입을 삐쭉이고 강아름을 안은 채 안방으로 향했다.
강준혁은 그녀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시선은 빨간 입술에 잠시 머물렀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잠시 후, 안방에서 다정하고 포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야기 듣고 싶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아름이가 좋아할까?”
“아름은 토끼와 늑대 이야기 좋아해요!”
“그래? 오늘은 그거 들려줄게.”
강준혁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나른한 표정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
깊은 밤, 한참 웃고 떠들던 방 안의 소리도 점점 잦아들었다.
강준혁은 팔을 베고 누운 채 어둠 속에서 고요한 호흡을 이어갔지만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단지 눈을 감고 불면증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원래 잠이 매우 얕은 편이라 푹 자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심지어 수면제조차 큰 효과가 없었다.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 수많은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그 누구도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래서 고요한 밤이 찾아오면 늘 습관처럼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곤 했다.
깊은 잠에 빠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잊은 지도 오래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유일하게 편안히 잠든 건 5년 전 그랑제 호텔에서였다.
그날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꾸준히 지켜오던 자제력이 처음으로 무너졌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을 때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이 느슨해지면서 서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제 다시는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 사람이 되어버렸다.
강준혁은 심란한 마음에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컵에 차가운 물을 따라 식탁에 기대어 서서 한 모금 마셨다.
딸깍!
이때, 침실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옮겼다. 희미한 불빛을 받아 살금살금 걸어 나오는 안신혜를 발견했다.
어둠 속에 잠자코 있던 강준혁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그의 예상대로 의도가 불순한 여자인 만큼 오늘 밤 그냥 넘어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용히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물을 마셨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지켜볼 참이었다.
밖으로 나온 안신혜는 암흑 속에서 이동했다.
소파에 있는 강준혁을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히 서로 눈이라도 마주치면 민망하니까.
강아름에게 동화를 읽어준 탓에 목이 말라서 어쩔 수 없이 나왔다.
엉거주춤 걸어가는 안신혜는 괜스레 짜증이 났다.
분명 자기 집인데 대체 왜 도둑처럼 굴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안신혜는 기억을 더듬으며 주방 쪽으로 걸어가 물컵을 찾아 헤맸다.
이때, 자기도 모르게 우뚝 멈추었다. 손끝에 따뜻한 물체가 닿자 기분이 묘했다.
“어?”
당황스러운 나머지 무의식중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이 촉감, 뭔가 이상한데?
주방의 대리석 표면은 분명 차가운데 말이다.
안신혜는 입술을 깨물고 양손을 천천히 위로 뻗었다. 이내 닥치는 대로 만지며 좀 더 자세히 확인하려고 했다.
평평하고, 넓고, 근육이 느껴지는 단단한 무언가.
결국 혼란만 가중되어 손에 힘을 주어 힘껏 꼬집었다.
“윽!”
머리 위에서 옅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진 나지막한 한마디.
“다 만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