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그녀의 격한 반응에 심유준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지만 이 여자가 또다시 눈물을 글썽거리니 차오르는 의심을 꾹 짓눌렀다.
그는 임다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하게 말했다.
“그년 임신해봤자 너한테 아무런 협박이 안 돼. 나중에 아이랑 함께 해외로 나갈 거야.”
순간 임다인이 더 경악하며 쏘아붙였다.
“지금 그 아이 낳게 할 생각이야?”
“다인아...”
심유준은 그녀의 반응에 너무 놀랐던지 미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임다인이 곧바로 늘 그래왔든 가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흘리지도 않은 눈물을 닦으며 목소리를 파르르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아이 낳으면 안 될 것 같아. 오빠, 나 그냥 아이 지우게 해줘.”
“안돼!”
심유준은 가차 없이 거절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잠시 고민하다가 불현듯 두 눈을 반짝거렸다.
“이럴 땐 형 찾으면 돼. 형은 무조건 방법이 있을 거야.”
심씨 일가 큰아들 심지후를 찾아간다고?
임다인은 동공이 흔들리더니 곧바로 그를 불러세웠다.
심지후는 일찌감치 해외로 나가서 여태껏 해외시장만 책임지고 있다. 게다가 그는 워낙 예리하다 보니 아버지인 심도운보다 더 끔찍한 상대였다.
“아니야, 가지 마. 내가 좀 더 고려해볼게.”
임다인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가 평소와는 너무 달라 살짝 의아해졌고 문득 도강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심유준은 끝내 그녀에게 물었다.
“다인아, 강우가 왜 네 아이를 인정 안 하는 거지?”
“그건...”
임다인이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눈가에 짜증이 살짝 스쳤다.
‘이 인간 왜 이렇게 끈질겨? 내가 대답 회피하는 거 안 보이냐고?’
다만 아직은 대놓고 짜증을 부릴 수가 없다.
그녀가 줄곧 아무 말 없자 심유준의 의심이 점점 커졌다.
그는 일부러 장난치듯 말을 이었다.
“강우가 인정 안 할까 봐 두렵지? 걱정 마. 오빠가 있는 한 반드시 너랑 강우 결혼시켜줄 거야.”
임다인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그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다가 한참 후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나직이 말했다.
“강우 애 맞아. 다만 그날 밤에 강우가 너무 취해서 아무것도 모를 뿐이야. 그러니까...”
심유준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술에 취해 그런 거네! 그래도 책임을 회피하는 건 아니지. 지금 바로 두 사람 이혼시키고 만다 내가!”
심유준은 또다시 도강우를 찾아갈 기세였다.
‘자식이 감히 내 동생을 괴롭혀?’
그가 떠나려 하자 임다인은 마지못해 그의 팔을 부둥켜안고 속으로 구시렁댔다.
‘이런 멍청이가! 내가 강우한테 알리고 싶지 않다잖아. 대체 왜 이렇게 설쳐대는 거야?’
“오빠.”
임다인이 속상한 말투로 말했다.
“강우는 책임감 있는 남자야. 하윤 언니가 임신했으면 두 사람 이혼시키진 말아줘. 강우 힘들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 아이는...”
그녀는 또다시 배를 어루만지며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심유준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
이에 그녀가 웃었다.
“이 아이 낳을 거야. 앞으로 이 아이는 오직 내 아이야.”
“그건 안 돼!”
아빠와 형이 알게 되면 그는 분명 아작날 것이다.
하지만 임다인이 눈물을 글썽거리자 또 막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심유준은 결국 시선을 피하고 어딘가 불안한 말투로 말했다.
“아이 낳는 거 엄청 고생이야. 넌 안 그래도 귀한 몸인데... 정 그렇게 아이가 좋으면 하윤의 애 뺏어올래?”
심하윤의 잘못은 맞지만 아이는 어디까지나 도강우의 애니까.
만약 그 아이를 뺏어오면 임다인은 애 낳는 고통도 안 겪을뿐더러 도강우와 심하윤의 사이를 깔끔하게 끝낼 수 있다.
임다인의 눈가에 혐오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다만 그녀는 금세 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언니도 힘겹게 가진 아이이니 이만 됐어. 난 강우 결정 따를래.”
심유준은 그런 그녀가 점점 더 안쓰러웠다.
“너 그럼 애 낳고 어디서 키울 건데? 전에 엄마가 나한테 섬 하나 선물해주신 적 있는데 너도 엄청 마음에 들어 했잖아. 그 섬 너 줄게.”
임다인은 활짝 웃다가 또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줌마가 오빠한테 남겨주신 건데 내가 어떻게 그래?”
“괜찮아. 오빠가 너한테 주는 거야. 엄마도 아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야.”
임다인이 미처 거절하기도 전에 심유준은 부랴부랴 가서 이전 절차를 밟았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임다인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날렸다.
역시 심씨 일가에서 가장 속이기 쉬운 건 심유준이었다.
저녁 무렵.
심하윤이 위층에서 그림을 그릴 때 검은색 벤틀리가 별장 입구에 멈춰 섰다.
임다인이 차에서 내려오자 집사가 난감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다인 씨 오셨어요? 미리 말씀하시면 다인 씨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해드렸을 텐데...”
임다인은 다정한 미소를 지은 후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집사님, 언니 집에 없어요?”
그녀는 보다시피 심하윤을 찾아왔다.
이에 집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임다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언니 여기 있는 거 다 알아요. 오빠가 말해줬거든요. 나 그냥 언니랑 몇 마디 얘기 나누려고 온 것뿐이에요. 언니랑 오빠 사이가 조금 삭막하잖아요.”
그제야 집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재를 가리켰다.
임다인은 원하는 대답을 얻고서 곧장 위층에 올라갔다.
그녀는 노크도 없이 벌컥 서재로 들어갔다.
한편 심하윤은 창작에 몰두해서 그녀가 들어온 줄도 몰랐다.
이때 임다인이 설계도를 덥석 낚아챘다.
“참나.”
그녀는 경멸의 미소를 날리며 비아냥댔다.
“이딴 쓰레기를 누가 산다고 그래?”
고개를 들고 거들먹거리는 임다인의 몰골을 쳐다본 순간 심하윤은 미간을 확 구겼다.
“이리 줘.”
“싫다면?”
임다인은 그림을 흔들면서 허리를 살짝 숙였다.
별안간 그녀의 눈가에 질투의 빛이 스치고 심하윤의 턱을 확 짚으며 경고 조로 말했다.
“심씨 일가도 내 거고 강우도 내 거야. 감히 강우 애를 가져? 빌어먹을 년!”
심하윤은 독기 어린 그녀의 눈빛을 보더니 본능적으로 배를 가렸다.
그러고는 바짝 긴장한 채 임다인에게 쏘아붙였다.
“난 이미 강우랑 이혼할 생각이야. 두 사람 알아서 결혼하고 잘 살아. 대체 뭐가 문젠데?”
“칫!”
임다인이 또다시 코웃음 쳤다.
그녀는 설계도를 갈기갈기 찢고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껄끄러워. 그냥 확 죽어버리지 그래?”
임다인은 언짢은 듯 머리를 살짝 두드렸다.
“아니지, 명 짧은 너희 엄마처럼 이제 곧 죽겠네.”
그녀가 사악한 미소를 날렸다.
심하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에 찬 눈길로 말했다.
“임다인! 아무리 그래도 우리 엄마 한때 널 후원해주신 분이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니?”
다만 임다인은 존중해주긴커녕 더 한심한 말만 내뱉었다.
“아니! 너무 늦게 죽었어. 내가 그 몇 해 동안 얼마나 서럽게 지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