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뭐라고?’
심하윤은 못 믿겠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임다인이 제멋대로 지어낸 말도 다 믿어주다니?
“그런 거 아니에요! 못 믿겠으면 CCTV 확인해보세요.”
심하윤이 또다시 해명에 나섰다.
하지만 이번엔 심유준이 실실 비꼬았다.
“네가 진작 CCTV 껐잖아. 나중에 다인이한테 뒤집어씌우려고 그런 거 아니야?”
‘참나...’
심하윤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트렸다.
‘됐다, 그만하자.’
더 말해봤자 이 인간들은 안 믿어줄 테니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가여운 표정을 지었다.
문득 심지후가 옛 생각에 빠져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심하윤은 지금처럼 가여운 모습이었는데...
다만 그는 곧장 차가운 시선으로 돌변했다.
“심하윤.”
나직이 이름을 부르더니 이어진 말은 그녀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만 같았다.
“너 오늘부로 우리 집에서 나가. 이제 더는 엮이지 말자.”
엮이지 말자고?
그녀는 몸이 파르르 떨리고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큰오빠가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줄이야.
심도운과 심유준까지 쭉 훑어본 후 그녀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알았어요.”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너무 괴롭진 않았다. 심지어 해탈한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심씨 일가와 정말 인연이 없는 거겠지.
심하윤이 너무 흔쾌히 대답하자 심유준은 오히려 마음이 씁쓸했다.
그는 코웃음 치며 쏘아붙였다.
“또 무슨 수작 부리려고? 잘 들어! 앞으로 두 번 다시 우리 가족 들먹이지 말고 멀리 꺼져. 우리 앞에 얼씬거리지도 마. 알겠어?”
심도운도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라.”
“네.”
그녀는 머리를 들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들 걱정 마세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곧이어 그녀는 배를 어루만졌다.
어쩌면 두 달도 못 버티고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 모두의 소원을 이뤄준 셈이다.
심지후는 미간을 구기고 심하윤을 째려봤다.
그녀는 꼭 마치 목각인형처럼 생기가 없었고 그 모습이 실로 이상할 따름이었다.
그가 줄곧 십하윤을 쳐다보자 심유준이 얼른 팔을 잡아당겼다.
“형, 이제 그만 다인이 보러 가자. 애가 많이 놀랐을 텐데 옆에 아무도 없으면 엄청 두려워할 거야.”
임다인을 언급한 순간 심지후의 눈빛이 한없이 다정해졌다.
“그래.”
그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작은 병실에 또다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심하윤은 배를 어루만지며 슬픔에 잠겼다.
“미안해, 아가야. 엄마 때문에 이 세상에 나와보지도 못했네.”
문 앞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도강우는 눈동자가 살짝 떨렸지만 금세 차가운 시선으로 돌변했다.
그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이혼합의서를 내던졌다.
“사인해.”
심하윤은 그를 올려다보고는 곧바로 이혼합의서에 사인했다.
그러고는 다시 서류를 돌려줬다.
“이만 나가.”
도강우는 눈썹을 치키며 그녀를 자세히 살폈다.
퀭한 그녀의 눈빛을 보더니 도강우가 불현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 잡종 진짜 내 아이야?”
그의 질문은 심하윤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녀는 도강우를 한참 바라보다가 겨우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화까지 내자 도강우가 피식 웃었다.
“너 남자들이랑 놀아났잖아. 성시완도 썸씽 있는 거 아니야? 그 잡종 누구 건지 갈피가 잡히긴 해?”
심하윤은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여태껏 날 이 정도로밖에 생각 못 했구나.’
한편 도강우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요즘 집에도 안 들어오고 밖에서 놀아나더니 딴 남자들이랑 그런 역겨운 사진까지 찍을 줄이야.
도강우는 자존심이 제대로 상했다.
그녀가 줄곧 침묵하니 이 남자도 분노가 치솟았다.
“대답 안 해? 아니면 할 말 없는 거야?”
“도강우.”
그녀는 나직이 이름을 부르며 싸늘한 시선을 마주했다.
“꺼져.”
이 말밖엔 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남자인데 이제 더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뭐지? 왜 이런 반응이야?’
도강우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목을 조르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죽고 싶냐?”
심하윤은 숨 가쁘고 온몸에 고통이 차올랐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도강우의 손등을 적셨다. 뜨거운 눈물이 닿은 순간 그도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도강우는 마침내 손을 놓고 증오에 찬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띄지 마.”
“콜록콜록.”
심하윤은 한참 기침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잠긴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걱정 마. 네 소원대로 더는 안 나타날게.”
순간 도강우는 가슴이 움찔거렸다.
설마 성시완을 만나려는 걸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이 남자의 눈가에 살의가 비쳤다.
심하윤처럼 지독한 년은 그냥 확 죽어버려야 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눈물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망설여졌다.
대체 그녀가 얼마나 원망스러운 건지도 모르겠고 왜 그녀가 죽길 바라는지도 이해가 안 됐다.
도강우는 뜻밖에도 허겁지겁 줄행랑을 쳤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심하윤은 그제야 피를 토했다.
그녀는 너무 아파서 몸을 움츠리고 침대에 누웠다.
다시 깨났을 때 성시완이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마침내 정신 차린 그녀를 보더니 성시완은 기쁨도 잠시 또다시 엄숙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에 심하윤이 피식 웃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뭘 이렇게 엄숙해?”
성시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기한이 많이 남았을까 봐? 그래서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유산하고 먹지 말아야 할 약까지 먹은 거야? 하윤아, 계속 이런 식이면 정말 그냥 죽어버리는 수가 있어.”
진지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심하윤은 석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 곧 죽어?”
성시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안 남았어.”
심하윤은 눈을 감고 홀가분하게 웃었다.
“그래, 차라리 죽자. 이제 아쉬울 것도 없잖아.”
“아니, 방법이 있긴 있어. 우리 지도 교수가 비밀 실험을 연구 중인데 네가 실험체가 되어준다면 어쩌면... 일말의 희망이 생길지도 몰라.”
“실험?”
심하윤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한참 후 그녀가 질문을 건넸다.
“위암에 관한 실험이야?”
“응.”
그녀는 새로운 희망을 부여잡은 것만 같았다.
“그럼 한번 해볼래.”
생각보다 단호한 대답에 성시완이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성공 확률은 10%야. 죽을 가능성이 매우 커.”
그가 머뭇거리자 심하윤이 피식 웃었다.
“시완아, 지금 내가 죽은 거나 산 거나 별반 다를 게 있어 보여?”
“해볼래!”
그녀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이에 성시완은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음날.
심씨 일가 일행과 도강우는 동시에 소식을 받고 한 시간 후 병원에 도착했다.
도강우는 차가운 얼굴로 병원에 도착해 심유준 일행을 보더니 저도 몰래 미간을 구겼다.
별안간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왔다.
“강우야, 여길 왜 왔어? 심하윤 그년이 또 무슨 수작 부릴 수도 있잖아.”
심유준이 그에게 말했고 심도운도 한마디 곁들었다.
“그래, 맞아. 우린 하윤이가 무슨 유언을 남겼다길래 온 거야. 이제 더는 걔랑 아무 연관 없으니 쇼하는 거 봐줄 생각도 없어.”
“유언이요?”
도강우의 일그러진 얼굴이 좀 더 창백해졌다.
그도 마찬가지로 유언이란 소식을 듣고 찾아왔으니까.
다들 뭔가 생각난 듯 수술실로 시선을 옮겼다.
심유준은 코웃음 치면서 야유를 퍼부었다.
“또 무슨 수작인지 참! 죽으면 우리가 마음 흔들릴까 봐? 후회할까 봐?”
도강우도 미간을 구기고 짜증이 확 밀려왔다.
심하윤이 감히 죽을 리가. 그는 전혀 안 믿는 눈치였다.
“내가 들어가서 까발려야지 안 되겠어! 진짜 죽을 생각이라면 바로 소원 들어줘야지.”
심유준이 수술실 문을 열 기세였고 도강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하윤이 컨디션 조회해봤는데 아무 문제 없었어.”
심지후가 입을 열었다.
“연기하는 거라면 안에서도 분명 협조해줄 거야. 내가 의사 한 명 심어뒀으니까 이따가 직원 통로로 우릴 데려다줄 거야. 심하윤 만나거든 거짓말 바로 까발리면 돼.”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비서가 사람을 데리고 왔다.
“가자 이만!”
심유준이 잔뜩 흥분한 채 세 사람을 거느리고 수술실에 들어섰다.
한창 심하윤 수술에 몰입하던 성시완이 그들을 보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여길 왜 들어와요?”
그녀는 정말 수술대에 누워서 피범벅이 되었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이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진짜 수술 중이라니?
옆에 있던 간호사가 불현듯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
“큰일 났어요, 교수님! 환자분 심정지 상태예요!”
성시완은 무작정 쳐들어온 일행을 신경 쓸 겨를 없이 조수들과 함께 구급에 나섰다.
그러나 여러 번의 심폐소생술과 제세동에도 불구하고 심전도가 직선으로 변해버렸다.
띠.
귀청이 째질 듯한 경보음이 최종 결과를 선고했다.
심하윤은 결국 죽었다.